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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65

유럽의 아프리카 점령: 이슬람의 저항과 아프리카 노예의 부상 유럽의 아프리카 점령과 그 저항: 포르투갈과 이슬람 세력의 충돌 유럽의 아프리카 점령은 16~18세기 사이로 국한되었습니다. 유럽 최강국이던 포르투갈은 1578년 모로코에서 참담하게 패한 뒤 모잠비크에서 내륙 진출이 막혀 앙골라까지 식민지를 확장할 수 없었습니다. 이슬람의 압박도 갈수록 거세졌습니다. 1591년 모로코 군대가 사하라를 건너 톤디비의 니제르강 유역에 위치한 송가이 제국을 파괴했습니다. 동쪽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인 에티오피아 왕국을 정복하려는 이슬람 아달왕국을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1562년부터 에티오피아를 지배한 사르사 덴젤이 오히려 아달과 오스만을 물리치고 왕국을 확장했습니다. 사하라 이남 지역의 내부 분쟁과 가뭄: 사회적 혼란과 노예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는 잦은 분쟁이 .. 2023. 7. 2.
오스만제국의 건국과 몰락 유럽인들이 해상 제국을 건설하는 사이 비유럽 세계에서는 육지 제국들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투르크족의 오스만 왕조는 13세기 말 아나톨리아에 공국을 세운 뒤, 1204년 4차 십자군 전쟁 당시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상당히 약해진 비잔티움 제국과 연이은 전투를 벌여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1354년 유럽 겔리볼루 반도에 첫발을 디딘 오스만 왕조는 1389년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14~15세기 발칸 반도 정복에 성공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잔티움 제국뿐 아니라 저항하던 기독교 국가들도 같이 쇠락한 덕분이었습니다. 1402년 티무르의 공격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 확장은 제동이 걸렸지만, 이내 재개되어 1453년 술탄 메흐메트 2세.. 2022. 11. 4.
전 세계를 뒤흔든 물건, 설탕의 비밀 세상을 바꾼 물건이 고작... 설탕? 설탕 : 설탕(屑糖, sugar)은 사탕수수나 사탕무에서 얻은 원당을 정제공장에 투입하여 만든 천연 감미료로, 수크로스(자당)를 주성분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에 널리 쓰이며 특히 과자나 빵에는 반드시 쓰입니다. 세계를 움직여온 세계 상품 중 첫 사례가 설탕입니다. 그래서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전 세계의 정치가들과 실업가들은 설탕의 생산권 확보와 그 유통의 장악 문제를 놓고 온갖 지혜를 짜내느라 고심했습니다. 그 결과, 브라질이나 카리브해의 섬들에 사탕수수 생산을 위한 대농장, 즉 플랜테이션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감미료가 부족했던 시대에 설탕의 중독성은 엄청났지만 뜨겁고 습한 열대 지방에서만 자라는 설탕 수수는 재배하기 상당히 어려운 작물이었습니다.. 2022. 6. 17.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2편 정복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사회를 냉혹하고 원시적인 비문명 사회로 낙인찍어 멕시코에서처럼 전면전과 잔혹한 살상을 서슴지 않은 건 물론, 원주민 고유의 특징들을 지워버리고자 기를 썼습니다. 현지 종교 시설을 파괴하고 기존의 관행은 근절시켰습니다.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선택할 수 있었지만 정식 승인된 종교는 기독교뿐이었습니다. 오스만과 무굴, 만주족이 정복했을 때에도 다른 종교 관행들이 이어지기는 했지만 유라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종교는 갈등의 원인이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인과 그들 후손의 수는 원주민 부족 인구를 결코 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 이교도들과 끝없이 전쟁을 벌이고 원주민에 대한 지배력을 이용하여 토착 귀족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한편, 협조적.. 2022. 3. 23.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스페인이 1519~1521년 아즈텍 문명을 정하고 1535년 잉카문명을 정복하면서 신대륙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스페인이 이권 보호를 위해 유럽에 쏟아부은 자원에 비하면 극히 일부밖에 동원하지 않았음에도 두 문명을 멸망시켰습니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초기 군사 작전의 성공뿐만이 아닙니다. 강철 투구와 검에서 비롯된 전투력의 우위로 스페인의 승리가 보장되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틀락스칼텍스족 같은 원주민들이 스페인에 기꺼이 협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스텍 통치가 피지배층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기원전 1세기 철기시대의 민족들이 충돌할 때와 마찬가지로 잉카인이나 아스텍인들은 총기류는커녕 말조차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철이나 강철이.. 2021. 12. 19.
아메리카의 탄생 - 유럽의 콘도미니엄이 된 신대륙 콜론이 인도를 발견했다고 흥분하며 에스파냐로 돌아오자 일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인도에 닿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콜론의 항해는 예상한 것보다 너무 짧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동방 세계에 대한 그 시대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아시아 세계와 콜론이 기술한 '인도'에 관한 내용이 매우 달랐기에 그런 의심은 더욱 커졌습니다. 이런 풍조를 잘 이용한 인물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입니다. 베스푸치는 콜론이 인디아스라고 부른 땅이 실은 인도가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대륙 인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아메리카로 굳어지는 대륙 이름 1507년 도서 박람회에서 세계 지도를 첨부한 '지리학 입문'을 펴내면서 지도 제작자 발트제.. 2021. 11. 7.
에스파냐, 잘못된 항로 선택의 결과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통치자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통치자 페르난도 2세가 혼인하면서 에스파냐는 통일 국가에 성큼 가까워졌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 후아나는 펠리페 1세와 결혼했는데, 잘 생긴 남편이 부정한 짓을 저지를까봐 늘 노심초사하다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나중에 '광녀 후아나'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에스파냐 왕에 오른 인물이 카를로스 1세입니다. 1519년에 오스트리아의 왕 카를 5세가 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하는 등 명함이 무척 많았던 왕으로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의 영광과 위기를 두루 겪었습니다. 콜론이라는 모험가의 도박이 성공을 거두다. 터키의 이스탄불은 에게해와 흑해 사이의 길목에 있는 도시로 비잔티.. 2021. 10. 6.
강력한 해양 제국, 포르투갈 지중해의 변방인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 해양 강국이 된 데는 항해왕자라고 일컬어지는 엔히크의 노력이 있습니다. 나중에 마젤란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두루 거쳐 세계를 한 바퀴 돈 것도 엔히크가 닦아 놓은 기반 때문입니다. 포르투갈 국왕 후안 1세는 1300년대 국경 분쟁에서 에스파냐를 물리치고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엔히크는 그의 아들입니다. 엔히크 왕자의 머릿속은 온통 항해에 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각지에 항해 학교, 천문대, 도서관, 항구, 조선소를 세우며 해양 강국을 향한 꿈을 불태웠습니다. 인프라가 잘 갖추어지자 유럽 각지의 고급 항해사들과 기술자들이 포르투갈로 몰려왔습니다. 선박은 장거리 항해에 적합하게 개량되고 발전되었습니다. 헤게모니를 쥘 수 있었던 포르투갈의 역사 포.. 2021.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