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세계사

유럽의 아프리카 점령: 이슬람의 저항과 아프리카 노예의 부상

by EDMBLACKBOX 2023. 7. 2.
반응형

1578년 포르투갈은 모로코 알카사르 케비르 전투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한다.

유럽의 아프리카 점령과 그 저항: 포르투갈과 이슬람 세력의 충돌

유럽의 아프리카 점령은 16~18세기 사이로 국한되었습니다. 유럽 최강국이던 포르투갈은 1578년 모로코에서 참담하게 패한 뒤 모잠비크에서 내륙 진출이 막혀 앙골라까지 식민지를 확장할 수 없었습니다. 이슬람의 압박도 갈수록 거세졌습니다. 1591년 모로코 군대가 사하라를 건너 톤디비의 니제르강 유역에 위치한 송가이 제국을 파괴했습니다. 동쪽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인 에티오피아 왕국을 정복하려는 이슬람 아달왕국을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1562년부터 에티오피아를 지배한 사르사 덴젤이 오히려 아달과 오스만을 물리치고 왕국을 확장했습니다.

 

사하라 이남 지역의 내부 분쟁과 가뭄: 사회적 혼란과 노예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는 잦은 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의 주민들은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분쟁의 원인은 대부분 심각한 가뭄과 가근이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옥수수와 카사바, 땅콩이 들어와 유럽의 감자와 같은 역할을 했음에도 상황은 여전히 열악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전쟁 양상 변화와 노예 시장: 유럽의 이익을 위한 대서양 경제 통합

아프리카에서는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가는 것이 적군을 견제하는 방법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노예가 늘어나면서 값이 떨어져 유럽인들은 신대륙의 노동력을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프리카 내쟁기 사용이 널리 확산되면서 노동력이 저평가되었고, 결과적으로 노예 비용은 더 떨어졌습니다. 17세기에는 아프리카의 전쟁 양상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주요 무기가 맨손에서 총포로 바뀌고 군대의 규모도 더 커진 것입니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노예를 끊임없이 공급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강력한 군사력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플랜테이션 경제의 번영으로 높아진 구매력과 대서양의 통합 경제 때문이었습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