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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22

조선 전기 시대 과학 기술의 발달 소개 조선 초 세종을 전후한 시기에는 과학 기술이 매우 발달하였습니다. 이는 당시의 집권 세력이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에 필요한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서역과 중국의 선진 과학 기술을 수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농민 생활과 국가 경제의 기반이 되는 농업에 도움을 주는 '천문학'을 특히 중요시하였습니다. 태조 때에는 고구려 천문도를 바탕으로 별자리를 돌에 새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세종 때에는 천체 운행을 측정하는 혼천의와 간의,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 시간을 측정하는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등을 만들고, 서양보다 200년 앞서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만들어 농사에 활용하였습니다. * 역법의 발달 : 당의 선명력(통일 신라, 고려) -> 원의 수시력(고.. 2022. 10. 26.
조선 전기의 문화 성리학과 불교, 도교, 민간신앙의 발달 성리학의 발달 고려 말 급진파 사대부인 정도전, 권근 등은 관학파로 불리며 성리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불교, 도교, 풍수지리,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고려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부국강병을 추구하였습니다. 반면에 사림파라 불린 정몽주와 길재의 후학인 온건파 사대부들은 성종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당시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하려 하였는데 성리학 이외의 사상은 배격하였습니다. 16세기에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실천하면서 근본이 되는 인간 심성에 관심을 가지고 이기론을 발전시켰습니다. * 이기론 :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기의 움직임에 의해 우주 만물이 만들어지며, 이는 기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이자 운동.. 2022. 6. 14.
조선 전기의 문화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을까? 15세기를 주도하던 관학파는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해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여 훈민정음의 창제(1443년)를 통해 민족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관학파는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이라도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여 자주적인 민족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교육 기관으로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을 서울에 두었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 중앙에 4 학과 지방에 향교를 설치하였습니다. 그 외 서원과 초등 교육을 담당한 서당이 있었습니다.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소과 합격생인 생원과 진사로 제한되었습니다. 지방의 향교는 부·목·군·현에 하나씩 설립하여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담당하게 하였고 중앙에서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여 교육을 담당하게.. 2022. 3. 21.
조선시대 전기의 수취 제도와 사회정책 수취 제도의 확립 조선의 수취 제도는 농사짓는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 집집마다 부과하여 토산물을 거두는 공납, 호적에 등록된 16세 이상의 정남에게 부과하는 군역과 요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양안을 근거로 징수한 전세는 수확량의 10분의 1세가 기본이며 매년 풍흉과 수확량을 조사하여 징수하였습니다. 세종 때 조세 제도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공법을 시행하여 그해의 토지 비옥도와 풍흉에 따라 전분 6 등법과 연분 9 등법을 시행하여 전세 액수를 1 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로 징수하였습니다. 전세는 쌀, 콩 등 현물로 징수하여 조운 제도를 이용하여 경창으로 수송하였습니다. 공납은 각 지역의 토산물을 조사하여 지역 관청에 물품과 액수를 할당하면, 지역 관청이 그 지역의 가호에 할당량을 분배하여 징수하.. 2021. 12. 15.
조선시대 전기의 경제와 사회에 대해 알아보자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펴다. 조선은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중농 억상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 방편으로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주고 토지 개간을 장려하였으며 새로운 개간지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려 말 50여 만결 정도였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엽에는 160여 만결 정도로 증가하였습니다. 반면에 상공업에 대한 규제는 강화하여 사·농·공·상 간의 직업적 차별을 통해 상공업의 발달을 억제하였습니다. 또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 경제관과 함께 도로 등 교통수단의 미발달,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적 경제로 인한 화폐 유통의 부진 등도 상공업의 발달을 방해하였.. 2021. 11. 7.
조선시대 사림의 성장과 성리학적 질서의 확산 사림(士林)의 등장 고려 말 등장한 신진 사대부는 조선 시대에 와서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계유정난(1453년)을 계기로 등장한 세조의 공신(정난공신, 좌익공신)들을 훈구 세력이라고 합니다. 훈구 세력의 기원은 고려 말 조선 건국을 주도한 급진적인 사대부 계열의 공신들로 조선 건국과 조선 초기 문물 정비에 적극 참여한 세력입니다. 이들은 고위 관직과 많은 토지를 세력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실권을 세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종은 세력이 커진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세력을 대거 등용하였습니다. 사림은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정몽주의 후학으로 성리학의 이념에 투철한 중소 지주 출신으로, 지방에서 학문과 교육에 힘쓰면서 향촌 사회의 지배층으로 자리 잡은 세력.. 2021. 10. 3.
조선의 건국 년도와 조선 통치체제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공민왕의 개혁 실패 후 고려 사회의 모순은 심화되었고, 대외적으로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노략질도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홍건적과 왜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 등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1387년 명이 철령위 사건을 일으키자 최영은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고, 이성계가 4 불가론을 들어 반대하였지만 결국 요동 정벌이 단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벌 과정에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1388년). 그 후 이성계와 결탁한 신진 사대부는 고려 사회의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 개혁파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혁파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이색, 정몽주 등 대다수 온건 개혁파는 고려.. 2021. 9. 4.
고려의 문화에 대해 알아보자 성리학의 수용과 유학의 발달 고려 시대에는 유교적 정치 이념이 강조되어 유학 교육이 확대되고 유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습니다. 고려 초기 광종은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적 소양을 지닌 신진 관료들을 등용하였고, 성종은 고려 초기 대표적 유학자인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수용하고 유교적 정치 이념을 내세웠으며 중앙에 국자감, 지방에 향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국자감은 유학부와 기술학부를 두어 관료와 기술 인력을 양성하였습니다. 고려 중기에는 문벌 귀족 사회가 안정되면서 유학도 점차 보수화되었습니다. 해동공자로 칭송받은 최충은 9재 학당(문헌 공도)을 설립하여 제자 양성에 힘썼고, 이를 계기로 사학 12도가 성립하여 사학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사학의 융성으로 관학인 국자감이 쇠퇴하자 관학 진흥책으로.. 2021. 8. 4.
고려의 경제와 사회 알아보기 전시과 제도의 시행 태조 왕건은 공신들에게 역분전을 지급하였고, 경종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전시과 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시정 전시과, 976년). 전시과는 관리에게 전지와 시지의 수조권을 지급한 것으로 목종(개정 전시과, 998년), 문종(경정 전시과, 1076) 시기에 개정되었습니다. 경종 때 실시된 시정 전시과는 직관과 산관을 대상으로 관품과 인품을 18등급으로 나누어 지급하였습니다. 목종 때 실시된 개정 전시과는 직·산관에게 관품만을 기준으로 지급하였고, 문종 때 실시된 경정 전시과는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직관에게만 지급하였으며 지급하는 토지의 결수를 줄였습니다. 전시과에 따라 지급받은 토지는 소유권이 아닌 수조권만을 지급한 것으로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국가에 반환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 2021. 7. 12.
고려의 대외관계 후기사회 송나라, 거란, 여진과의 대외 관계 고려는 송과는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발해 멸망 등을 이유로 북방의 거란(요)은 배척하였습니다. 이에 거란은 1차로 소손녕을 보내 고려를 침략(993년)하였는데, 서희가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을 통하여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하여 고려의 영토에 편입시켰습니다. 이후 거란은 강조 정변을 구시로 2차 침입을 하였으나 양규, 김숙흥의 활약으로 격퇴하였고, 3차 침입 때에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서 소배압의 거란군에게 대승을 거두는데 이것이 바로 귀주 대첩(1019년)입니다. * 강동 6주 : 강동 육주는 993년(고려 성종 12년) 요나라(거란)의 제1차 침입 때 서희가 요나라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영유권을 인정받은 고려 서북면의 영토입니다. 당시 담판에서는 ".. 2021. 6. 21.
고려 문벌귀족과 무신정권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성종 이후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며 지방 호족 출신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들 중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역임한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고 합니다. 문벌 귀족은 과거제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 등을 통하여 경제 기반을 확보하며, 왕실 및 다른 귀족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강화하였습니다. 비틀거리는 문벌 귀족 사회 일부 문벌 귀족 가문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권력을 둘러싼 문벌 귀족 간의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유력한 문벌 귀족인 경원 이 씨 가문의 이자겸은 왕실과의 중첩된 혼인을 통하여 금의 사대 요구를 수용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에 인정오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 2021. 5. 31.
고려 건국 과정 귀족 사회의 발전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의 통일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한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며 고구려를 건국하고(918년), 연호를 '천수'라 하고 송악(개경)을 도읍으로 삼았습니다. 왕건은 호족 세력을 통합하며 후백제와 경쟁하였고, 고창(안동) 전투에서 후백제에 승리하여 우세한 위치를 확보하였습니다. 한편,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되었습니다. 이후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하였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도 후백제의 거듭된 침략 등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려에 항복하였습니다(935년). 이후 고려는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일리천 전투에서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936년). 한편 발해가 거란에 멸망(926년)한.. 2021. 5. 20.
신라의 혼란과 후삼국 성립 신라 하대의 사회 동요 신라는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앙 진골 귀족 간의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무열왕 직계의 혜공왕이 피살된 이후 155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될 정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왕위 다툼과 잦은 왕위 교체로 왕권이 약화되면서 집사부 시중의 권한은 약화되고 귀족 대표인 상대등의 권한이 강화되었습니다. * 신라 하대의 왕위 쟁탈전을 살펴보면 내물왕의 10대손 김양상이 혜공왕을 살해하고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 하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헌덕왕 14년(822년) 웅천주 도독 김헌창은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며, 흥덕왕 이후에는 왕위 쟁탈전이 더욱 격화되어 민애왕은 희강왕을 살해하여 즉위하였고 신무왕은 민애왕을 살해하여 즉위하는 등 하대 1.. 2021. 5. 3.
남북국 시대의 사회·경제·문화 살펴보기 통일신라의 사회와 경제 신라는 삼국 통일 후 민족 융합 정책을 추진하여 백제, 고구려 귀족들도 골품제에 편입시켰으며 중앙군인 9 서당에는 신라인 이외에도 옛 백제인, 고구려인과 말갈인까지 포함시켰습니다. 한편, 통일 이후에도 골품제가 유지되어 관직과 일상생활에서의 차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신문왕 때에는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였으나,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하고 관료전이 폐지되었습니다. 성덕왕 때에는 통일 후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15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정전을 지급하였습니다. 통일 신라의 일반 백성에게는 조세·역·공납의 의무가 있었는데 세금 수취를 위해 민정 문서(촌락 문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촌락 내 인구수, 토지, 가축 등을 조사하여 기록한 것으로 춘주가 3년마.. 2021. 4. 30.
남북국 시대 성립과 발전 정리 통일 신라의 성립과 왕권 강화 진골 출신의 최초 왕이 된 무열왕(김춘추)은 삼국 통일을 시작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고, 이후 무열왕 직계 후손이 왕위를 이어갔습니다. 무열왕의 뒤를 이은 왕은 문무왕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을 몰아내어 삼국 통일을 완성하였습니다. 이어서 즉위한 왕은 신문왕이며 김흠돌의 난을 계기로 진골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강력한 왕권을 마련하였습니다. 신문왕은 9주 5 소경의 지방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군인 9 서당과 지방 군인 10정을 조직하였으며,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습니다. 또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켜 왕권 강화 도움을 주었습니다. 성덕왕은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여 백성의 삶을.. 2021.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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