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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조선의 건국 년도와 조선 통치체제

by EDMBLACKBOX 2021.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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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공민왕의 개혁 실패 후 고려 사회의 모순은 심화되었고, 대외적으로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노략질도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홍건적과 왜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 등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1387년 명이 철령위 사건을 일으키자 최영은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고, 이성계가 4 불가론을 들어 반대하였지만 결국 요동 정벌이 단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벌 과정에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1388년).

 

그 후 이성계와 결탁한 신진 사대부는 고려 사회의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 개혁파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혁파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이색, 정몽주 등 대다수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의 틀 속에서 점진적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고 역성혁명을 지향하였습니다. 결국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 세력은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후 과전법을 시행하고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고 조선 왕조를 건국하였습니다.

 

조선 유교 정치의 실현 노력

태조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경복궁을 건설하여 도읍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당시 정치를 주도했던 정도전은 유교적 민본주의에 입각한 국정 운영을 위해 재상 중심의 정치를 강조하였으며,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정도전 등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6조 직계제를 시행하였고, 문하부 낭사를 분리하여 사간원으로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였으며, 사병을 혁파하여 군권을 일원화하였습니다. 또 호패법을 시행하였고, 양전 사업을 실시하였으며, 신문고를 설치하고,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노비를 해방하여 사원의 경제적 기반을 위축시켰습니다.

 

왕권과 경제가 안정된 가운데 즉위한 세종은 의정부 서사제를 시행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확대하면서도 인사권과 군사권은 직접 행사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였습니다. 또한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여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하였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습니다. 청백리 재상을 등용하여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였고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섬(대마도)을 정벌하게 하고 최윤덕, 김종서를 보내 4군과 6진을 개척하였습니다.

 

문종이 일찍 죽고 단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재상들의 권한이 커지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 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에 즉위하였습니다(세조). 이후 강력한 왕권 행사를 위해 6조 직계제를 시행하고, 집현전을 폐지하였으며 경연을 중단하였고, 경제적으로는 과전법을 고쳐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주는 직전법을 시행하였습니다. 또한 왕권 강화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기도 하였습니다.

 

성종은 조선 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반포하였습니다. 이어 집현전을 계승한 홍문관을 설치하여 모든 관원에게 경연관을 겸하게 하였으며, 김종직을 필두로 사림을 중용하여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중앙 정치 체제와 지방 행정 조직

조선 시대 정치 체제는 경국대전에 의해 법제화되었으며 경관직(중앙)과 외관직(지방)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중앙 정치 체제에서는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와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6조가 중심이었습니다. 한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는 언론 기능을 담당하여 관리의 비리를 관찰하고 정사를 비판하며, 문필 활동을 하였습니다. 3사의 언론 활동을 통해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밖에 왕명 출납을 담당한 승정원과 나라의 중죄인을 다스린 의금부는 왕권을 뒷받침하는 기능을 하였습니다. 또 서울의 행정을 담당한 한성부, 역사서의 편찬과 보관을 담당한 춘추관,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모든 군·현에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려 시대에 존재했던 향·소·부곡과 같은 특수 행정 구역은 모두 소멸하였습니다. 지방에 파견된 관리를 수령이라 하였는데, 수령은 지방의 행정·사법·군사권을 행사하고 행정 실무를 보좌하는 세습적 아전인 향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정부는 수령을 지휘, 감독하기 위해 8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였으며,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수령을 감찰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향촌에 거주하는 양반들은 자치기구인 유향소를 만들어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향리를 감찰하면서 백성을 교화하였습니다. 정부는 서울에 경재소를 설치하고 유향소와 정부 사이의 연락 기능을 맡겨 유향소를 중앙에서 통제하였습니다.

 

조선시대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조선에서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 남자는 군역의 의무를 갖고 있었습니다(양인 개병제). 그들은 현역 군인인 정군과 정군의 경제적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봉족)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정군은 서울에서 근무하거나 국경 요충지에 배속되어 일정 기간을 두고 교대로 복무하였으며, 복무 기간에 따라 품계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군사 조직은 중앙군과 지방 군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중앙군은 궁궐과 수도를 수비하는 5위가 있었습니다. 5위는 정군을 중심으로 직업 군인인 갑사나 특수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지방 군은 건국 초기에 국방상의 요지인 영이나 진에 소속되어 복무하였으므로 영진군으로 불렸는데, 육군 부대인 병영과 수군 부대인 수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세조 이후에는 진관 체제를 시행하여 각 도에 파견된 병마절도사가 관할 지역의 군대를 장악하였고, 병영 아래에 몇 개의 거진을 설치하여 거진의 수령이 그 지역 군대를 통제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등으로 구성된 예비군 성격의 잡색군이 있었습니다. 한편 군사 조직과 더불어 교통과 통신 제도도 정비되어, 군사적 위급 사태를 알리기 위해 봉수제가 구축되고, 물자 수송과 통신을 위한 역참도 설치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교육과 관리 등용 제도

조선에서 교육의 목적은 유교적 지식을 갖춘 관리를 양성하는 것이었고 양인이면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양반 자제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교육 과정은 일반적으로 서당에서 교육을 받은 후, 한성은 4부 학당, 지방은 향교에서 유교 경전을 가르쳤습니다. 소과에 합격한 사람은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외국어, 천문학, 의학 등의 기술 교육은 해당 관청에서 실시하였으며, 주로 중인이 공부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관리는 과거, 음서, 천거를 통하여 선발하였습니다. 과거는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 기술관을 선발하는 잡과로 구분되었습니다. 문과에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와 부정기 시험인 중광시, 알성시 등이 있었습니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후에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대과(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고 하급 관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조선에서는 고려와 달리 무과가 실시되어 명실상부한 양반 관료 체제가 구축되었습니다. 기술관을 뽑는 잡과에는 역과, 율과, 의과, 음양과의 네 분야가 있었는데 해당 관청에서 필요에 따라 시험을 실시하여 선발하였습니다.

 

법적으로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나 과거 응시가 가능하였지만 문과에는 주로 양반 자제가, 무과에는 양반에서 상민까지, 잡과는 주로 중인층이 응시하였습니다. 과거 외에 고관의 추천을 받아 간단한 시험을 치른 후 관직에 등용되는 천거제와 고관의 자녀를 과거를 거치지 않고 등용하는 음서제도 시행되었지만 시행되는 경우가 드물었고 고관 승진도 어려웠습니다.

인사 관리 제도도 정비되어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막기 위한 상피제가 실시되었고, 인사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5품 이하 관리의 등용에는 서경을 거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은 관료적 성격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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