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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고려의 문화에 대해 알아보자

by EDMBLACKBOX 2021.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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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헌실기

 

성리학의 수용과 유학의 발달

고려 시대에는 유교적 정치 이념이 강조되어 유학 교육이 확대되고 유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습니다. 고려 초기 광종은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적 소양을 지닌 신진 관료들을 등용하였고, 성종은 고려 초기 대표적 유학자인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수용하고 유교적 정치 이념을 내세웠으며 중앙에 국자감, 지방에 향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국자감은 유학부와 기술학부를 두어 관료와 기술 인력을 양성하였습니다.

 

고려 중기에는 문벌 귀족 사회가 안정되면서 유학도 점차 보수화되었습니다. 해동공자로 칭송받은 최충은 9재 학당(문헌 공도)을 설립하여 제자 양성에 힘썼고, 이를 계기로 사학 12도가 성립하여 사학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사학의 융성으로 관학인 국자감이 쇠퇴하자 관학 진흥책으로 숙종은 국자감에 도서관인 서적포를 설치하였고, 예종은 국자감에 전문 강좌인 7재를 두어 관학의 내실을 다지고 양현고라는 장학 재단을 설치하였습니다.

 

이후 무신 집권기에는 유학 교육이 쇠퇴하였으나 원 간섭기에 일시적으로 부흥하였습니다. 성종 때 세워진 국자감은 충렬왕 때 국학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충선왕 때는 다시 성균관으로 개칭되었습니다. 공민왕 때에는 성균관을 순수 유교 기관으로 정비하여 조선까지 이어졌습니다.

 

송나라 때 성립된 성리학은 원 간섭기인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 도입되었습니다. 성리학은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신유학으로 실천적 기능을 강조하였습니다. 성리학은 이후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의 신진 사대부에 계승되었고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불교의 폐단과 권문세족의 횡포를 비판하고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였습니다.

 

 

고려 역사서 편찬

고려는 건국 초부터 '왕조실록'을 편찬하였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8대 현종 때 태조부터 목종까지 7대 실록이 다시 편찬되었습니다. 중기에는 '삼국사기(김부식)'가 편찬되었는데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바탕을 두고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되었으며, 신라 중심의 역사의식이 나타나 있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무신정변과 몽골의 침입을 겪으며 자주 의식과 전통문화가 강조된 역사서가 나타났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무신 정변과 몽골의 침입을 겪으며 자주 의식과 전통문화가 강조된 역사서가 나타났습니다. '해동고승전(각훈)'은 삼국 시대 이래의 명승들의 전기를 정리한 책이고, '동명왕편(이규보)'은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서사시입니다. '삼국유사(일연)'와 '제왕운기(이승휴)'는 우리 역사의 시작을 단군 조선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고려 말기에는 성리학적 유교 사관이 대두하여 '사략(이제현)' 등이 집필되었습니다.

 

 

대각 국사 의천

고려의 불교와 도교, 그리고 토착 신앙

고려 시대의 불교는 건국 초기부터 국가적 지원을 받아 발전하면서 국가와 사회를 통합하고 외세가 침략하였을 때 국가를 지키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습니다. 태조는 개경에 사원을 건립하고 훈요 10조를 통해 연등회, 팔관회 등 불교 행사를 중시하도록 하였으며, 국사와 왕시를 두어 불교에 국교의 권위를 부여하였습니다. 또 광종은 과거에 승과를 실시하였고 균여를 귀법사의 주지로 임명하여 불교 통합을 추구하였습니다.

 

고려 중기에는 왕실의 지원으로 교종이 발전하였고, 선종과의 종파적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각국사 의천은 교단 통합 운동의 일환으로 화엄종을 중심으로 한 교종 계통의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여 천태종을 중심으로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의천은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고자 교관겸수를 제시하였습니다.

 

무신 집권기에는 무신들의 지원을 받아 선종이 번성하였습니다. 보조국사 지눌이 수선사 결사 운동을 전개하여 불교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고,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내세워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습니다. 이후 지눌의 제자인 혜심은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여 성리학 수용의 사상적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요세(了世)는 백련사 결사를 조직하여 지방 세력과 농민들의 호응을 얻어 수선사와 함께 고려 후기 불교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말 불교가 권문세족과 결탁하여 다시 폐단이 드러나자 신진 사대부들은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도교는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신앙으로 일반 백성들에게도 유행하였습니다. 국가 차원의 도교 행사와 초제가 성행하였고, 도교 사원이 건립되기도 하였습니다. 도교는 불교적 요소와 도참사상, 민간 신앙 등을 흡수하였으나, 일관된 교리와 교단을 세우지는 못하였습니다. 풍수지리설은 도참사상과 결합하여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고려 건국 초에는 서경 길지설을 내세워 북진 정책의 이론적 근거로 삼았고, 중기 이후에는 남경 길지설이 대두되어 한양을 남경으로 승격시키고 궁궐을 짓기도 하였습니다.

 

 

직지심체요절

고려시대 인쇄술의 발달

고려 시대에는 목판 인쇄술과 활판 인쇄술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현종 때 제작된 고려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은 목판 인쇄술 발달에 기여하였습니다. 한편 송에 다녀온 의천은 송과 요의 주석서를 모아 '신편제종교장총록'을 제작하고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4,700여 권의 '교장(속장경)'을 편찬하였습니다. 또 고종 시기 몽골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도감에서 제작된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금속 인쇄술이 발달하였습니다. 고종 때 강화도에서 제작된 '상정고금예문'은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본보다 200여 년 앞서 제작되었으나 현존하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은 청주 홍덕사에서 간행된 '직지심체요절'로서,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 과학 기술의 발달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최무선은 화통도감의 설치를 건의하여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는데, 이는 우왕 때 진포 대첩 등에서 왜구 격퇴에 큰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조선술도 발달하여 30m가 넘는 대형 범선과 대형 조운선이 제작되고 병선에도 화포를 설치해 왜구 격퇴에 활용하였습니다. 천문학과 역법은 농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달하였습니다. 천문 현상을 관측하는 기관으로 사천대(서운관)를 설치하여 천체와 기상을 관찰하고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역법은 고려 초에는 당의 선명력을 사용하였고, 고려 후기에는 원의 수시력과 명의 대통력을 받아들였습니다.

 

또 혜민국, 대비원, 제위보 드의 의료 시설이 설치되어 왕족, 귀족뿐만 아니라 양민과 천민도 의료 혜택을 누렸습니다. 의료 업무와 의학 교육은 태의감에서 담당하고 과거 시험에 의과를 실시하여 의관을 선발하였습니다. 13세기에 편찬된 '향약구급방'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최고 의학 서적으로 각종 질병에 대해 우리 풍토에 맞는 처방과 약재 등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고려의 대표적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과 고려 나전칠기 염주함

고려의 예술과 문학

고려 문벌 귀족 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자기, 금속 공예, 나전 칠기 등 정교하고 세련된 공예 기술이 발달하였습니다. 자기는 11세기에는 독자적인 경지에 이른 순청자가 발달하였고, 12세기에는 고려의 독특한 기술인 상감법이 개발되어 우수한 상감 청자가 생산되었으며 고려 말부터는 자연스러운 분청사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해 조선 초기에 유행하였습니다. 금속 공예는 불교 도구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은입사 기술과 나전 칠기 공예가 유행하였습니다.

 

고려 전기의 미술로는 문인화와 산수화가 널리 그려졌으나 전해지는 작품은 없습니다. 다만 고려 말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천산대렵도가 남아 있어 당시 화풍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려의 불화는 대단히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 특징인데 대표적인 불화로는 혜허의 수월관음도가 있습니다. 이 밖에 서민의 정서를 담은 청산별곡, 쌍화점 등의 장가(속요)가 유행하였고, 신진 사대부 사이에서는 한림별곡, 관동별곡과 같은 경기체가가 유행하였으며, 공중 음악인 아악이 발전하였습니다.

 

 

좌측 상단부터 개성 불일사 5층 석탑, 평창 월정사 팔각 9층 석탑,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 서울 원각사지 10층 석탑

고려 시대 건축과 불교문화

고려 초기에는 주심포 양식이 유행하여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응전이 배흘림기둥에 주심포 양식으로 축조되었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다포 양식의 건물도 축조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사리원 성불사의 응진전을 들 수 있습니다.

 

고려 초기의 석탑은 다각 다층탑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개성 불일사 5층 석탑과 송의 영향을 받은 평창 월정사 팔각 9층 석탑 등이 있습니다.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조선 시대 서울 원각사지 10층 석탑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 다양한 형태의 승탑과 탑비도 제작되었는데 팔각 원당형을 계승한 여주 고달사지 승탑과 사각형의 특이한 형태로 조형미가 뛰어난 원주 법천사지 지광 국사탑과 탑비 등이 대표적입니다.

 

불상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제작되었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하남 하사창동 철조 석가여래 좌상과 같은 대형 철불이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는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나 파주 용미리 마애 이불 입상, 안동 이천동 석불 같은 대형 석불이 세워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불상들은 큰 규모에 비해 균형미가 떨어지지만 소박한 지방 문화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주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은 신라 양식을 계승한 뛰어난 세련미를 지니고 있어 고려 불상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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