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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고려의 대외관계 후기사회

by EDMBLACKBOX 2021.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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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거란, 여진과의 대외 관계

고려는 송과는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발해 멸망 등을 이유로 북방의 거란(요)은 배척하였습니다. 이에 거란은 1차로 소손녕을 보내 고려를 침략(993년)하였는데, 서희가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을 통하여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하여 고려의 영토에 편입시켰습니다. 이후 거란은 강조 정변을 구시로 2차 침입을 하였으나 양규, 김숙흥의 활약으로 격퇴하였고, 3차 침입 때에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서 소배압의 거란군에게 대승을 거두는데 이것이 바로 귀주 대첩(1019년)입니다.

 

서희의 외교 담판을 그림으로 담은 모습, 출처 : 전쟁기념관

* 강동 6주 : 강동 육주는 993년(고려 성종 12년) 요나라(거란)의 제1차 침입 때 서희가 요나라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영유권을 인정받은 고려 서북면의 영토입니다. 당시 담판에서는 "안북부(安北府)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이르기까지 총 280리 사이에 적당한 지역"이라 칭해지며, 나중에 이곳에 성을 쌓아 강동 6주라 불렀으니,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구성), 곽주(곽산)의 여섯 지역입니다.

 

연이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후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고 압록강 입구에서 동해의 도련포에 이르는 지역에 천리장성을 쌓아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고려를 어버이의 나라로 섬기던 여진은 12세기 초에 완옌부를 중심으로 강성해져 고려의 국경 지대를 자주 침략하였습니다. 고려는 여진의 침입에 맞서 싸웠으나 보병 중심의 고려군은 기병 중심의 여진에게 패배하였습니다.

 

이에 고려는 윤관의 건의로 별무반을 조직하여 여진을 북방으로 쫓아내고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1107년). 하지만 계속되는 여진의 9성 반환 요구와 방어의 어려움 때문에 1년여 만에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이후 여진은 세력을 키워 금을 건국하고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고려 집권 세력인 이자겸 등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금의 사대 요구를 수용하였습니다. 이로써 고려 초부터 내려오던 북진 정책은 좌절되었습니다.

 

 

시작되는 원의 내정 간섭

몽골과 강화를 맺은 고려는 워의 부마국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독립국의 지위는 유지하였지만 원은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파견하는 등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였고, 고려 왕 실의 호칭과 관청의 명칭이 격하되었습니다. 또 원은 고려의 영토를 빼앗아 쌍성총관부(화주), 동녕부(서경), 탐라총관부(제주도)를 설치하고 직접 통치하였습니다.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때 원이 반환하였으나 쌍성총관부는 공민왕 때 탈환할 때까지 원이 지배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금·은·베·인삼·사냥용 매 등의 특산물과 고려의 처녀를 공녀로 징발하였고, 원의 일본 원정을 위해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고려의 많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일본 원정(1274,1281년)은 태풍으로 실패하였으나 정동행성은 계속 남아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습니다. 원 간섭기에 고려에서는 몽골의 풍습인 몽골 풍이 유행하였고, 공녀 차출을 피하려 조혼의 풍습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원에서도 고려의 풍속이 유행하여 고려양이라 하였습니다. 원의 간섭으로 고려는 자주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원의 압력과 친원파의 횡포로 정치가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고려 후기의 정치 변화(공민왕의 업적)

원의 간섭이 지속되면서 친원적 성향을 가진 권문세족이 대두하였습니다. 충선왕은 사림원을 설치하여 토지 제도와 수취 제도의 폐단을 개혁하려 하였으나 권문세족의 반발로 실패하였습니다. 개혁이 실패하자 충선왕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연경(베이징)에 '만권당'이라는 학문 연구 기관을 세웠습니다.

 

14세기 중엽, 한족의 반란으로 원은 점차 쇠퇴하였습니다. 이를 틈타 공민왕은 적극적인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여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으며,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수복하여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습니다. 격하된 왕실 호칭과 관제도 복구하였으며, 변발과 호복 등의 몽골풍을 금지하였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방을 폐지하고, 과거제와 성균관을 정비하여 신진 사대부를 적극 등용하였습니다. 아울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얻은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려 하였으나, 권문세족의 반발로 신돈과 공민왕이 제거되며 개혁은 실패하였습니다.

 

* 정동행성 : 고려 후기 원에 의하여 일본 원정을 위한 전방사령부로서 고려에 설치되었던 관서입니다. 정동행성의 기능은 전환되었으나 명칭은 그대로 고려 말기까지 존속하였습니다. 정식 명칭은 정동행중서성으로서 '정동'은 일본 정벌을 뜻하는 것이고, '행중서성'은 중앙정부 중서성(中書省)의 지방 파견기관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실패하였지만, 신진 사대부가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신진 사대부는 대부분 지방의 향리 자제들로, 무신 집권기 이래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하였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였고, 권문세족과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며 고려 말의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였습니다. 14세기 후반 홍건적과 왜구가 빈번하게 고려에 침입하였는데,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 등의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였습니다. 한편 새로 수립된 명이 고려에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자 당시 실권자였던 최영 등은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명령에 따라 요동으로 진군하던 중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위화도 회군, 1388년). 이후 과전법을 실시하여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신진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여 새 왕조 건립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신진 사대부는 권문세족 축출 이후 정도전 중심의 급진파와 정몽주 중심의 온건파로 나뉘었는데 온건파는 새 왕조 건설에 반대하였고, 급진파는 새 왕조 건설에 찬성하였습니다. 결국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파는 정몽주 등의 온건파를 제거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1392년).

 

* 이성계의 4 불가론 : 이성계가 내세운 4 불가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군량미·군사 규모 등에서 명과 대결할 만한 능력을 갖지 못한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상책이 되지 못함. 둘째, 전쟁 시기를 여름철로 잡은 것은 잘못인데, 이 시기에 전쟁을 벌이면 농사를 망칠 뿐 아니라 농민의 호응을 받기가 어려움. 셋째, 거국적으로 대군을 원정시키면 그 틈을 타서 왜구의 침입이 증대함. 넷째, 당시 장마철이므로 전투하기에 불편하고 전염병으로 군사들이 희생될 우려가 크다는 것 등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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