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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고려 문벌귀족과 무신정권

by EDMBLACKBOX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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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들을 살해하는 무신들, 출처 : KBS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성종 이후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며 지방 호족 출신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들 중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역임한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고 합니다. 문벌 귀족은 과거제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 등을 통하여 경제 기반을 확보하며, 왕실 및 다른 귀족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강화하였습니다.

 

 

비틀거리는 문벌 귀족 사회

일부 문벌 귀족 가문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권력을 둘러싼 문벌 귀족 간의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유력한 문벌 귀족인 경원 이 씨 가문의 이자겸은 왕실과의 중첩된 혼인을 통하여 금의 사대 요구를 수용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에 인정오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켰습니다(1126년). 이자겸은 궁궐을 불태우고, 인종을 감금하였으나, 인종이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을 제거한 후, 척준경마저 탄핵함으로써 이자겸의 난은 결국 실패합니다. 결국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고 문벌 귀족 사회는 급격히 동요합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묘청, 정지상 등 개혁적 성향의 서경파와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개경파가 대립하였습니다.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며 서경 천도, 칭제 건원, 금국 정벌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서경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묘청 등은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며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년),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하여 진압되었습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는 더욱 빠르게 진전되었습니다.

 

* 이자겸의 난 - 이자겸의 난은 척준경과 그의 군사적 배경이 연계되었기 때문에 이·척(李拓)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예종과 인종에게 자신의 딸을 왕후로 들이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이자겸을 인종이 자신의 측근세력을 종용하여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이 척준경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왕궁을 침범하여 국왕파 신료들을 제거한 다음 왕을 유폐시키며 정치를 독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종은 척준경을 이자겸과 갈라서게 해야 된다는 최사전의 계략을 수용하여 사태를 수습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이자겸은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포박되어 유배되었으며 인주 이 씨의 발호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 묘청의 난 - 묘청의 난(1135년 1월 19일 ~ 1136년)은 고려 인종 때 승려 묘청 등의 금국 정벌론과 서경 천도론이 개경 귀족들의 방해로 무산되자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 군호를 '천견충의군'이라 하여 대위국을 선언하고 일으킨 반란입니다. 대위국이라는 새로운 국가이념 차원의 반란은 김부식이 지휘하는 진압군의 공격을 받고 내부 분열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년간 치열하게 지속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인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두고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무신 정변과 최 씨 무신 정권의 성립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으로 문벌 귀족 사회가 크게 분열된 상황에서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종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실정을 거듭하였습니다. 또 문벌 귀족의 무신 차별 등으로 무신들의 불만은 커져갔습니다. 여기에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의 불만도 높아져 정중부와 이의방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습니다(1170년). 정중부와 이의방 등은 대다수의 문신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무신 최고기구인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무신 정권 초기에는 무신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으로 집권자가 바뀌었으나,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 4대, 60여 년간 이어지는 최 씨 무신 정권이 시작되었습니다. 최충헌은 사회 개혁안으로 봉사 10조를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최충헌은 국정을 총괄하는 정치 기구로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교정별감을 세습하며 권력을 행사하였고, 이어 집권한 최우는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고, 유학 지식과 행정 실무 능력을 갖춘 문인을 관리로 등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삼별초를 조직하여 치안과 정권 유지에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신 정권 시기 농민과 천민의 봉기

무신 정권 초기, 무신들의 집권에 대해 문신들이 반발하였고, 무신들의 수탈에 하층민은 저항하였습니다. 먼저 문신들이 무신정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습니다.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동계 지역에서 의종 복위를 꾀하며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습니다(1173년). 이어 서경 유수 조위총이 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서북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받았으나, 진압되었습니다.(1174년). 또 같은 해 교종 계통의 승려들도 무신 정권에 반발하여 봉기하였습니다.

 

무신들이 불법으로 토지와 노비를 늘리고 농민들을 수탈하자 전국 각지에서 하층민들의 봉기도 이어졌습니다. 공주 명학소에서는 망이·망소이가 과도한 수취에 반발하며 봉기하였고, 또 전주에서는 관노들이 봉기하였으며, 경상도의 운문과 초전에서는 김사미와 효심이 봉기하였습니다. 한편, 최 씨 무신 정권 시기에는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이 개경에서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 신분 해방을 주장하며 노비들을 모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습니다. 각지에서는 삼국 부흥 운동도 전개되었는데 서경에서 최광수가 고구려 부흥을 표방하며 봉기하였고(1217년), 담양에서는 이언년 형제가 백제 부흥을 표방하며 난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되었습니다(1237년).

 

* 망이·망소이의 난 - 고려 명종 때 신분제의 타파를 목적으로 충청도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과 소민들의 봉기입니다. 공주 명학소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으므로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무신집권기에 무신 상호 간의 권력다툼으로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각지에서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한 하층민들의 반항, 즉 민란이 빈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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