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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고려 건국 과정 귀족 사회의 발전

by EDMBLACKBOX 2021.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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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성립과 후삼국의 통일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한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며 고구려를 건국하고(918년), 연호를 '천수'라 하고 송악(개경)을 도읍으로 삼았습니다. 왕건은 호족 세력을 통합하며 후백제와 경쟁하였고, 고창(안동) 전투에서 후백제에 승리하여 우세한 위치를 확보하였습니다. 한편,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되었습니다. 이후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하였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도 후백제의 거듭된 침략 등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려에 항복하였습니다(935년). 이후 고려는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일리천 전투에서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936년).
한편 발해가 거란에 멸망(926년)한 이후 발해 유민들이 망명해 오자 고려는 이들을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민족 재통일을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 출처 : 에듀넷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 요약

공산 전투(927년) - 고창 전투(930년) - 발해 유민 포용(대광현 : 934년) - 견훤 귀순(935년) - 신라 항복(935년) - 후백제 멸망(일리천 전투 : 936년)

 

 

고려 초기의 국가 체제는 어떻게 정비하였는가?
태조 왕건은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여 '북진 정책'을 펼쳤습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이라 하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배격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 결과, 고려는 태조 말년에 영토를 청천강에서 영흥까지 확장하였습니다. 또 대광현 등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귀순해 오자 이들을 우대하며 받아들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민생 안정을 위해 조를 수확량의 1/10 이상 거두지 못하게 하는 등 지나친 수취를 금지(취민유도)하고 빈민 구제를 위해 '흑창'을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유력한 호족의 딸과 결혼하거나 왕 씨 성을 하사하여 호족 세력을 회유하는 한편 기인 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통하여 호족을 견제하였습니다. 또 '정계'와 '계백료서'를 짓고 훈요 10조를 후대 왕들에게 남겨 정책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2대 혜종과 3대 정종 때에는 외척 등 호족 세력이 개입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4대 광종은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 흑창 : 고려 태조가 베푼 빈민 구제 기관입니다.
* 기인 제도 : 태조 때부터 시행된 고려 때 지방의 호족 자제를 인질로 상경 숙위 하게 하는 제도 및 관직입니다.
* 사심관 제도 : 사심관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거주하면서 지방통치를 위임받아 처리하고 고문을 맡는 직책입니다.

 

광종은 노비 안검법을 실시하여(956년)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를 풀어 주어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재정 기반을 확대하였습니다. 또 과거제를 실시하여(958년) 유학자를 관리로 선발하여 호족을 견제하였습니다. 광종은 황제를 칭하고 광덕·준풍 등의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지배층의 위계를 확립하기 위해 관리들의 공복을 제정하였습니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고 중앙 행정 조직을 2성 6부로 정비하였습니다. 지방에는 12목을 설치하며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향리 제도를 마련하였습니다. 국립 교육 기관을 국자감으로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진흥에 힘썼습니다.

 

* 국자감 : 고려 시대에 유학을 가르치던 학교입니다. 성종 11년(992년) 종래의 경학을 개편하여 설치했습니다. 그 안에 국자학·태학·사문학과 율학·서학·산학 등의 전문학과를 두었습니다. 이후 국학·성균감·성균관으로 개칭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행정 조직, 출처 : 위키피디아

고려의 행정 조직 알아보기
고려의 통치 체제는 성종 때에 정비되었습니다. 고려는 당과 송의 제도를 수용하여 2성 6부제를 근간으로 하는 중앙 정치 조직을 운영하였습니다. 중서문하성의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여 정책을 결정하였고, 상서성 아래 6부를 두어 정책을 나누어 집행하였습니다. 그 외에 군사 기밀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중추원을 두고, 관리의 감찰을 맡은 어사대, 화폐와 곡식의 출납을 담당하는 삼사를 두었습니다.

 

고려는 독자적인 기구로 국방 문제를 담당하는 도병마사와 법률, 제도 등을 제정하는 식목도감을 두었는데 이 기구는 중서문하성의 2품 이상인 재신과 중추원의 2품 이상 고관인 추밀이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 기구입니다. 건국 초기 호족 세력으로 인하여 지방 통치가 어려웠는데 성종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종은 12목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며, 현종 때에는 전국을 경기와 5도 양계로 나누고 그 밑에 군현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중 5도에는 안찰사를 파견하고, 국경 지대에 설치한 양계에는 병마사를 파견하였습니다. 또 수도인 개경과 더불어 서경(평양), 동경(경주)을 3 경이라 하여 중시하였습니다. 고려는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였는데 지방관이 파견된 군현인 주현보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많았습니다. 조세나 공물의 징수와 노력의 징발 등 지방의 실질적인 행정 업무는 향리가 담당하였고, 특수 행정 구역으로 향·부곡·소가 있었습니다.

 

 

고려의 관리 등용 제도와 군사 제도
고려는 과거제와 음서제를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였습니다. 광종은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 처음으로 과거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과거제는 문과(제술과, 명경과), 잡과, 승과로 구분되었습니다. 양민 이상이면 응시할 수 있었으나, 제술과의 명경과는 주로 귀족과 고위 관리의 자제가 응시하였고, 잡과에는 주로 양민들이 응시하였습니다.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좌주)와 급제자(문생)는 좌주문생 관계라 각별한 사이로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음서는 왕실과 공신의 후손 및 5품 이상 고위 관리의 자손에게 시험 없이 관직을 주는 제도로서 고려가 합법적으로 특권의 세습이 가능한 귀족 사회임을 보여주는 제도입니다.

 

고려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와 국경을 방어하는 6위로 구성되었습니다. 중앙군의 상당수는 직업 군인으로 군인전을 지급받고, 직역을 자손에게 세습하였습니다. 지방군은 16세 이상의 양민 장정들로 편성되었으며, 5도 지역에 주둔하는 주현군과 양계에 주둔하는 주진군으로 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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