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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남북국 시대의 사회·경제·문화 살펴보기

by EDMBLACKBOX 2021.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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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시대 사회, 경제, 문화

통일신라의 사회와 경제
신라는 삼국 통일 후 민족 융합 정책을 추진하여 백제, 고구려 귀족들도 골품제에 편입시켰으며 중앙군인 9 서당에는 신라인 이외에도 옛 백제인, 고구려인과 말갈인까지 포함시켰습니다. 한편, 통일 이후에도 골품제가 유지되어 관직과 일상생활에서의 차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신문왕 때에는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였으나,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하고 관료전이 폐지되었습니다. 성덕왕 때에는 통일 후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15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정전을 지급하였습니다.

통일 신라의 일반 백성에게는 조세·역·공납의 의무가 있었는데 세금 수취를 위해 민정 문서(촌락 문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촌락 내 인구수, 토지, 가축 등을 조사하여 기록한 것으로 춘주가 3년마다 한 번씩 작성하였습니다.
통일 신라 때에는 국제 무역이 발달하여 당시의 대표적인 무역항인 울산항에는 이슬람 상인들이 왕래하였습니다. 9세기에는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장악하였습니다. 이러한 무역의 확대로 산둥 반도와 양쯔강 하류에는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라방과 신라촌, 신라소(관청), 신라관(여관), 신라원(사찰)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민정 문서에 대하여
민정 문서는 일본 도다이 지 쇼소인에서 발견되었으며(1933년), 8세기 중엽(755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 서원경(청주) 부근의 4개 촌락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논이나 밭, 촌주위답, 내시령답 등 토지의 종류와 면적을 기록한 정보가 있으며 인구·가호·노비의 수와 3년 동안의 사망·이동 등 변동 내용 그리고 남녀별, 연령별 인구수의 통계도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소, 말과 같은 가축들이나 뽕나무, 잣나무와 같은 식물들의 수도 적었다고 합니다.

민정 문서,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해의 사회와 경제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지배층의 핵심은 고구려인이었습니다. 중앙의 주요 관직 또한 고구려인이 차지하고 주민의 대다수는 말갈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농업의 중심은 밭농사였으며 목축이 발달하였습니다. 발해는 당, 신라, 거란, 일본 등과의 무역이 성행하여 말, 모피, 철, 인삼 등을 수출하고 비단과 서적 등을 수입하였습니다. 당은 산둥 반도의 등주에 발해인이 이용할 수 있도록 발해관을 설치하였습니다. 발해는 신라와는 신라도를 통해 교류하였고, 일본과는 일본도를 통해 활발하게 교류하였습니다.

 

통일 신라의 문화
통일 신라 시대에는 삼국 시대 때 전래된 불교가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원효는 화쟁 사상을 주장하였고,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만 외우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아미타 사상을 백성에게 전파하여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의상은 당 유학 후 돌아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며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고, 화엄종을 개창하여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건립하였습니다. 또 의상은 백성에게 현세의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전파하였습니다.

혜초는 당을 거쳐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순례한 뒤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였습니다. 통일 신라 말기에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선종은 지방 호족 세력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성장하여 9 산 선문을 이루었습니다. 또 도선에 의해 신라에 풍수지리설이 유입되었습니다. 통일 신라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아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신문왕은 유학 교육 기관인 국학을 설립하였고,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관리 채용의 기준으로 삼았으나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했습니다.

유교 진흥 정책에 따라 유학과 한문학에 뛰어난 강수, 설총, 최치원 등의 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강수는 외교 문서 작성에 뛰어나 당에 인질로 가 있던 김인문의 석방을 요구하는 '청방인문표'를 작성하기도 하였고, 설총은 이두를 정리하여 유교 경전을 우리말로 쉽게 풀이하였으며, '화왕계'를 지었습니다. 6두품 출신 유학자인 최치원은 당에서 빈공과에 합격하고 활동하다 귀국하여 진성 여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려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계원필경'이란 시문집을 지었습니다. 김대문은 '화랑세기', '고승전' 등의 역사서를 저술하였습니다.

신라 중대에는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불교 예술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건립되었고, 경주 불국사 3층 석탑과 다보탑, 감은사지 3층 석탑 등이 제작되었습니다. 한편, 경주 불국사 3층 석탑에서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신라 하대에는 기단과 탑신에 불상을 새긴 양양 진전사지 3층 석탑이 세워졌고, 선종의 유행으로 승려들의 사리를 봉안하는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탑 등의 승탑과 탑비가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통일 신라의 범종으로는 상원사 동종, 장중한 소리와 비천상으로 유명한 성덕 대왕 신종 등이 있습니다.

좌측 상단부터 경주 감은사지 3층 석탑, 경주 불국사 3층 석탑, 경주 불국사 다보탑, 경주 석굴암 본존상, 성덕대왕 신종, 양양 진전사지 3층 석탑,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탑, 무구정광 대다라니경, 출처 : 위키백과

 

발해의 문화
발해는 교육 기관인 주자감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과 한문학을 가르쳤는데 정혜 공주와 정효 공주의 묘지를 통해 발해의 뛰어난 한문학 수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당의 문화를 수용하였습니다. 정혜 공주 묘의 모줄임천장 구조와 돌사자상, 이불 병좌상과 온돌 장치, 석등 등은 고구려의 양식을 계승한 것입니다. 또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는 당의 장안성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며, 정효 공주 묘의 벽돌무덤 양식이나 벽화, 지린 성에 위치한 영광탑 등에서도 당 문화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좌측 상단부터 발해 석등, 정혜 공주 묘 돌사자상, 발해 이불병좌상, 발해 치미, 출처 : 위키백과,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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