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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신라의 혼란과 후삼국 성립

by EDMBLACKBOX 2021.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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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혼란과 후삼국의 성립

신라 하대의 사회 동요
신라는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앙 진골 귀족 간의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무열왕 직계의 혜공왕이 피살된 이후 155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될 정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왕위 다툼과 잦은 왕위 교체로 왕권이 약화되면서 집사부 시중의 권한은 약화되고 귀족 대표인 상대등의 권한이 강화되었습니다.

* 신라 하대의 왕위 쟁탈전을 살펴보면
내물왕의 10대손 김양상이 혜공왕을 살해하고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 하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헌덕왕 14년(822년) 웅천주 도독 김헌창은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며, 흥덕왕 이후에는 왕위 쟁탈전이 더욱 격화되어 민애왕은 희강왕을 살해하여 즉위하였고 신무왕은 민애왕을 살해하여 즉위하는 등 하대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면서 재위 1년 미만의 왕이 무려 4명이나 되었습니다.

이후 신라의 정치적 혼란
지방에서는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자신의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해상 무역으로 성장한 장보고 역시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였습니다. 중앙의 왕위 다툼으로 지방 통제력이 약화된 가운데 잇따른 자연재해와 지배층의 사치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지방민에 대한 강압적 수취가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지방민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나 초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진성 여왕 때에는 원종과 애노의 난과 같은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중앙의 지방 통제력이 상실되어 가자 독자적인 지방 세력으로 호족이 성장하였습니다. 호족은 그들의 근거지에 성을 쌓고 사병을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장군이라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던 지방 호족은 지방에서 성장하던 새로운 불교 종파인 선종을 이념적 지주로 삼았습니다. 또 금성 중심의 지리 개념에서 벗어나 다른 지방의 중요성을 강조한 풍수지리설을 환영하였습니다.

한편, 당에 유학하였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일부 유학생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를 비판하면서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자 호족 세력과 결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귀족의 반란과 농민들의 봉기, 출처 : ZUM 학습백과

 

그리고 후삼국의 성립
신라 하대의 혼란을 틈타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가 세력을 모아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 시대가 성립되었습니다.

견훤은 전라도 일대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현재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900년). 후백제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차지하며 그 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였으며, 중국의 후당과 오월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궁예는 처음에 북원(원주) 지방의 도적 무리인 양길 아래에서 세력을 키우다가 양길을 몰아내고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며 후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901년). 이후 궁예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고쳤으며 광평성 등을 설치하여 관계를 정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조세 수취와 미륵 신앙을 이용한 전제 정치로 민심을 잃게 되자, 신하들은 궁예를 몰아내고 송악의 호족 출신인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안성 칠장사 벽화에 그려진 궁예의 모습,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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