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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남북국 시대 성립과 발전 정리

by EDMBLACKBOX 2021.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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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시대 총정리

통일 신라의 성립과 왕권 강화
진골 출신의 최초 왕이 된 무열왕(김춘추)은 삼국 통일을 시작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고, 이후 무열왕 직계 후손이 왕위를 이어갔습니다. 무열왕의 뒤를 이은 왕은 문무왕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을 몰아내어 삼국 통일을 완성하였습니다. 이어서 즉위한 왕은 신문왕이며 김흠돌의 난을 계기로 진골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강력한 왕권을 마련하였습니다.

신문왕은 9주 5 소경의 지방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군인 9 서당과 지방 군인 10정을 조직하였으며,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습니다. 또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켜 왕권 강화 도움을 주었습니다. 성덕왕은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여 백성의 삶을 안전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후 경덕왕 때에는 신문왕 때 폐지되었던 녹읍이 다시 부활되었습니다.

문무왕(626년~681년) - 신라 제30대 왕이며, 태종 무열왕과 문명왕후의 맏아들입니다. 660년에 태종 무열왕을 대신하여 현지에서 신라 정예군을 총지휘하여 백제를 정복하였고, 668년 고구려를 정복하며 신라에 계림 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나당 전쟁에서 물리침으로써 676년 삼국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입니다.

 

통일 신라의 통치 체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새로운 나라에 맞게 통치 체제를 바꾸었습니다. 중앙 행정 조직은 집사부를 중심으로 운영하면서,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이 국정을 주도하였고, 집사부 아래에는 '13부'를 두었습니다.

* 상대등이란 무엇인가?
법흥왕 때 설치되었는데 귀족 회의인 '화백 회의'의 의장으로 주로 진골 귀족의 입장을 대변하여 왕권을 제약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라 중대의 전제 왕권 체제에서는 정치적 실권자의 위치에서 크게 후퇴하였고 대신 그 역할을 시중이 수행하였습니다.

계속해서 통일 신라의 통치 체제를 살펴보면,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 소경 체제로 정비하였습니다. 전국을 9개의 주로 나누고 군사·행정상의 요충지에는 5 소경을 두었습니다. 나머지 특수 행정 구역으로는 향·부곡을 설치하여 관리하였습니다.
군, 현 아래에는 촌락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아 다스렸습니다. 한편,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지방관을 감찰하고자 외사정을 파견하였습니다.

* 상수리 제도란 무엇인가?
각 주의 촌주 1명을 수도 금성의 여러 관청에 보내어 일정 기간 근무하게 한 제도로, 일종의 인질 제도라고 할 수 있으며, 고려 시대 기인 제도로 계승되었습니다.

군사 조직으로는 9 서당 10정을 설치하였는데, 중앙군인 9 서당은 신라인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말갈인 등을 포함하여 민족 융합을 하는데 노력하였습니다. 지방 군으로는 10정을 두었는데 9개의 주에 각각 1정씩 배치하고, 북쪽 국경 지대인 한주에 2정을 두었습니다.

 

발해의 건국과 발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출신 대조영(이하 고왕)은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이끌고 만주의 동모산(지린 성 둔화 시 부근)에서 발해를 건국하였습니다.(698년) 발해 2대 왕인 '무왕'은 연호를 '인안'으로 지정하고 발해와 대립하던 '흑수 말갈'을 토벌하는 한편, '장문휴'를 보내 당의 산둥 지방(등주 지방)을 공격하며 당에 대항하였습니다. 또한 일본과의 친선 관계를 통해 국제적 고립을 피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왕'은 연호를 '대흥'으로 지정하고 당과 친선 관계를 수립하여 당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3성 6부의 중앙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를 개설하였습니다. 9세기 초 선왕 때 발해는 요동 지역까지 진출하여 발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5경 15부 62주의 행정 구역을 정비하였습니다. 또 건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이 무렵 중국인들이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불렀을 정도로 그 세력이 대단하였습니다.

해동성국이란 무엇인가?
발해는 10대 선왕 대인수 시기에 중흥을 이룩하여 11대 대이진, 12대 대건황, 13대 대현석 대에 융성기를 맞이하여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다 건너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으로 발해의 전성기 때 중국에서 높여 부르던 말입니다.

하지만 발해는 10세기 초 지배층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이 쇠퇴하였고, 거란이 세운 요의 침입으로 결국 멸망하였습니다.(926년)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이 하였는데, 이것은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혹은 고려 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 고구려 문화와의 유사성 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발해의 통치 체제
발해의 중앙 정치 조직은 당의 '3성 6부'제를 수용한 것이지만 그 명칭과 운영 방식은 독자적이었습니다. 왕 아래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을 두었고 정당성 아래 '좌사정'과 '우사정'을 두어 6부를 나누어 관할하게 하였습니다. 정당성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습니다. 3성 6부 외에도 감찰 기구인 중정대와 교육 기관인 주자감을 설치하였습니다.

발해의 중앙 정치 구조, 출처 : 우리역사넷

지방 행정 구역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하여 관리를 파견하였습니다. 군사 조직으로는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를 경비하게 하였고, 지방 군은 해당 지방관이 지휘하도록 하였습니다.

 

발해의 행정 구역 5경 15부 62주
: 전략적 요충지에 둔 행정 구역입니다.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서경 압록부, 남경 남해부가 있었으며, 이 다섯 가지를 5 경이라고 불렀습니다. 북조선의 역사학계에서는 5 경이 고구려 시대의 부수도 제도를 계승한 것이라고 그 연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 모두 15부가 있었습니다. 5경 가운데 한 곳에 속하였고, 지방 행정 중심지로서 그 장관은 도독이라고 불렀습니다.
: 모두 62주가 있었습니다. 현재 60주의 명칭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대부분 부에 속해있었으며, 중앙에 직속된 독주주(영주·동주·속주의 3개 주)도 있었습니다. 장관은 자사입니다.
: 백여 개의 현이 주에 속해있었으며, 장관은 현승입니다.
촌락 : 지방 행정의 말단으로, 촌장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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