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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문화

by EDMBLACKBOX 2021.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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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과 가야의 문화

유학의 보급과 역사서 편찬

삼국 시대에는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고구려는 태학을 세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고, 지방에는 경당을 세워 청소년에게 유학과 무술을 가르쳤습니다. 백제는 오경박사와 의박사, 역박사 등을 두어 유교 경전과 기술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신라의 유학 발달 정도는 임신서기석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임신서기석은 두 청년이 국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고 시경, 상서, 예기, 춘추좌전 등 유교 경전을 학습해 나갈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 새겨진 비석으로, 신라 청소년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삼국은 모두 역사서를 편찬하였는데 고구려의 역사서로는 유기 100권과 영양왕 때 이문진이 유기를 간추려 편찬한 신집 5권이 있습니다. 백제의 역사서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편찬한 서기가 있으며, 신라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편찬한 국사라는 역사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의 역사서는 현재 모두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임신서기석 - 신라의 청년으로 짐작되는 두 사람이 학문을 닦고 힘써 실천할 것을 맹세한 내용으로 일종의 금석문서라고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와 도교를 받아들이다.

삼국은 지방 세력을 통합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왕즉불 사상을 통한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불교를 수용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중국 전진의 승려 순도를 통해(372년), 백제는 침류왕 때 중국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를 통해(384년) 불교를 수용하였습니다. 신라는 눌지왕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다가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527년)하였습니다.

삼국 시대에는 불교와 함께 도교도 전래되었는데 도교는 산천 숭배나 신선 사상과 결합하여 불로장생과 현세구복을 추구하였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사신도는 도교의 방위신이며,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 금동대향로에는 도교의 이상 세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라의 화랑도를 구선도라 하였는데 산천을 순례하며 심신을 수련한 것도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백률사터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의 이차돈 관련 기념비입니다.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이야기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공인되지 못하였습니다. 불교의 공인을 주장하던 이차돈은 절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나라에 가뭄과 장마가 겹치고 질병이 돌기 시작하였고 이에 불교의 공인을 반대하는 신하들에 의해 결국 처형당했습니다. 이차돈은 자신이 죽을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에서 흰 피가 하늘로 솟고 꽃비가 내렸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귀족들은 더 이상 불교를 반대하지 못하였고, 불교가 공인되었습니다.

 

삼국의 고분(지배층의 무덤)
고구려 초기에는 주로 돌무지무덤을 만들었으나 점차 굴식 돌방무덤으로 무덤 양식이 바뀌었습니다. 굴식 돌방무덤은 돌로 널방을 짜로 그 위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것으로 고분 내부에 벽이 있어 각저총 씨름도, 무용총 수렵도 등 벽화가 많이 발견됩니다.

백제 초기에는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석촌동 고분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돌무지무덤은 백제 건국 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임을 보여줍니다. 웅진 시기에는 굴식 돌방무덤이나 벽돌무덤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송산리 고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벽돌무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무령왕릉이 대표적입니다. 사비 시기에는 굴식 돌방무덤이 만들어졌는데 능산리 고분이 대표적입니다.

신라는 돌무지 덧널무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7세기 이후에는 굴식 돌방무덤이 주로 만들어졌습니다. 돌무지 덧널무덤은 나무로 관을 짜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조성한 것으로 무덤의 입구가 밖으로 드러나 있지 않아 도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껴묻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돌무지 덧널무덤으로는 천마총과 금관총, 황남대총 등이 있습니다.
삼국 통일 이후 무덤 주변에 12지 신상 등을 조각한 둘레돌을 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삼국의 고분 간단 표 정리

종류 돌무지 무덤 굴식 돌방무덤 돌무지 덧널무덤
구조 돌을 쌓아 올려 봉분을 조성함 돌로 널길과 널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음 이중의 나무 널(관)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 돌 위에 다시 흙으로 봉분을 조성함
특징과 의미 - 고구려와 백제 초기에 주로 만들어짐
- 백제 건국 세력(온조)이 고구려 계통임을 보여주는 사례임
- 삼국 후기에 모두 공통적으로 조성됨
- 백제에서는 중국 남조의 영향으로 굴식 돌방무덤의 구조를 벽돌로 조성한 벽돌 무덤이 만들어지기도 함.
신라에서만 보여짐
벽화 있음(내부 돌방에 벽과 천장이 있음) 없음(천마총 천마도는 벽화가 아닌 말 장신구인 장니에 그려진 그림)
도굴 위험 쉬움(무령왕릉은 도굴이 안 되어 많은 유물 발견) 어려움
합장 가능 가능함(무덤 출입문이 있음) 어려움

 

고분의 명칭에 대하여
왕의 무덤은 '릉'이라 하고 규모가 큰 무덤은 '총', '대묘'라 합니다. 대체로 삼국 시대 규모가 큰 무덤은 도굴로 훼손되거나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기록과 함께 매장하지 않아 무덤 주인공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무덤의 명칭은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이름을 붙여 '총'이나 '대묘'라 부릅니다.(예 : 무용총, 금관총, 천마총 등) 무령왕릉의 경우에는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임을 알 수 있는 지석이 출토되어 '릉'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삼국의 불상과 불탑들
삼국이 불교를 수용한 뒤 많은 불상과 불탑이 만들어졌습니다. 고구려의 탑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으며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6세기 말에 제작된 고구려의 대표적인 불상입니다.
백제의 탑은 목탑 양식으로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으며,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은 '백제의 미소'로 불립니다.
신라의 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이 전하며 현존하지는 않지만 선덕 여왕 때 자장의 건의로 만들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이 있고, 불상으로는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이 대표적입니다.

좌측 상단부터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고구려),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백제),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신라), 익산 미륵사지 석탑(백제),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백제),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신라)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삼국은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일본과의 교류를 활발히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승려 혜자는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호류 사 금당 벽화로 유명한 담징은 종이와 먹의 제조법을 전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수산리 고분 벽화는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삼국 중에서 일본과 가장 활발하게 교류한 백제는 아직기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를, 노리사치계가 불교를 전하였습니다. 신라는 배를 만드는 조선술과 제방을 쌓는 축제술을 일본에 전해 주었고, 신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저수지에는 '한인의 연못'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이 전해지면서 일본은 스에키라는 토기를 만들었습니다.

삼국 시대에는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가운데 삼산관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유명합니다. 일본의 고류 사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 상은 삼국 시대의 반가 사유상과 비슷하여 한반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도에 그려진 서역인과 신라 황남 대총에서 출토된 유리병, 경주 계림로의 한 고분에서 출토된 보검 등을 통해 삼국이 서역과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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