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한국사

고구려의 대외 관계와 신라의 삼국 통일

by EDMBLACKBOX 2021. 3. 11.
반응형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의 전쟁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주변으로 세력을 확대하자 위협을 느낀 고구려가 요서 지방을 먼저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수나라의 문제(황제)가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큰 성과 없이 물러났습니다. 그 뒤에 수 양제가 113만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에 대패하였습니다.(살수대첩 - 612년) 결국 수는 고구려 원정 패배 등의 원인으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수가 멸망한 이후 당이 중국을 통일하자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경에 천리장성을 축조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천리 장성 축조를 감독하며 세력을 키운 후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642년)
연개소문은 신라와 당에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이에 당의 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 등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당을 물리쳤습니다.(안시성 싸움 - 645년)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도, 출처 : 동아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도

고구려와 수·당 전쟁 심화 풀이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반도의 중앙을 점유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동맹을 체결하여 신라로 하여금 고립적 존재가 되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 특히 당나라에의 통로인 당항성(남양)을 공격하였습니다. 고구려의 명장 온달이 영양왕 초에 한강 유역을 공격하다가 아단성 밑에서 전사한 것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반도에서 정세 변화가 있던 6세기 후반기 이후는 동양 전체의 국제 정세에도 긴장이 조성되던 때였습니다.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수나라가 통일하고, 서몽골에는 유목 민족인 돌궐 족의 신흥 세력이 수를 위협했습니다.

한편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는 돌궐과 연결하여 수나라에 대항하려 했고, 백제는 바다 건너 일본과 통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합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수나라와 신라는 손을 잡았습니다. 이 양대 진영의 대립은 장차 풍운을 불러올 조짐을 보였고, 공격의 선수는 고구려가 취하였습니다.

 

  나·당 연합군의 결성 및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고구려가 수·당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고구려가 죽령 이북 지역인 한강 유역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여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고구려의 도움을 얻는 데 실패한 김춘추는 당에 건너가 동맹을 제의하여 결국 나·당 연합이 결성되었습니다.(648년)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소정방이 당의 해군을, 김유신이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은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맞아 결사 항전하였으나 패배하였습니다. 이어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660년) 백제 멸망 이후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이를 막아냈으나, 연개소문이 죽은 후 후계자 문제로 권력 다툼이 발생하여 국론이 분열되었습니다. 나·당 연합군이 이를 틈타 평양성을 함락시킴으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습니다.(668년)

김춘추(602~661)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 운동과 나·당 전쟁

백제 멸망 이후 각지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복신과 도침 등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여 주류성에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고, 흑치상지는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백제 부흥 군은 지도층의 분열과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좌절되었습니다. 당시 왜는 백제 부흥 군을 지원하기 위해 백강(금강) 입구에서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습니다.(백강 전투 - 663년)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검모잠, 고연무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습니다. 검모잠이 부장 왕의 서자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구려 유민을 모아 한성(황해도 재령)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고연무도 오골성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당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를,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에도 계림 도독부를 두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에 맞섰습니다. 신라는 금마저(익산)에 안승을 왕으로 하는 보덕국을 세워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고 매소성, 기벌포 등에서 당을 격퇴하여 삼국 통일을 달성하였습니다.(676년)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인 당을 끌어들였고, 영토도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으로 축소되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 문화를 통합하여 단일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당을 몰아냄으로써 자주성을 보여주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당 전쟁 원인 심화 풀이

나당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백제·고구려 멸망 이후 나당간의 영토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백제·고구려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승전의 대가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후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고자 하였습니다.

영토 문제 외에 좀 더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나·당 전쟁을 주도한 신라 수뇌부의 입장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나·당 연합이 결성되어 백제와 고구려를 원정하는 과정에서 당에 의한 신라 군령권 침해가 위험수위에 다다랐으며, 그에 따른 신라왕과 신라 군부의 반발이 거세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평양을 견제할 수 있고 한강 하류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전략 요충지인 비열홀을 둘러싼 나·당간의 갈등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열홀은 고구려 멸망 이전 신라가 장악하였으나,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안동도호부로 귀속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나·당 전쟁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나·당간의 영토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신라 군부의 불만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당 전쟁 기록화, 출처 : 전쟁기념관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