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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삼국 시대의 발전과 특징(고구려, 백제, 신라, 후기 가야)

by EDMBLACKBOX 2021.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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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발전과 역사

고구려는 4세기 초 미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지만,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고국원왕이 전사하여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후 즉위한 소수림왕(371~384년)이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체제 정비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전진과 교류하고 불교를 수용(372년)하여 사상을 통합하여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광개토 대왕(391~412년)은 정비된 체제를 기반으로 후연, 거란 등을 격파하여 요동을 포함한 만주 지역을 정복하고,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신라에 침입한 왜(일본)를 물리치고 금관가야를 공격하여 한반도 남부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습니다.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광개토 대왕의 위엄을 드높였습니다.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412~491년)은 중국의 남북조와 교류하며 외교적 안정을 유지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고(427년),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결국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충주 고구려비를 세우는 업적 만들었습니다.

좌측부터 광개토 대왕과 충주 고구려비

 

백제의 발전과 역사

백제는 4세기 중엽 근초고왕(346~375년)이 왕위 부자 상속을 확립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마한의 남은 영토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중국의 요서, 산둥, 규슈 지방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침류왕은 중국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384년)한 이후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맞서 비유왕 때 신라와 나·제 동맹을 결성(433년)하였으나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개로왕이 전사하여 웅진으로 천도(475년)하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웅진 천도 이후 동성왕(479~501년)은 신라의 소지왕과 혼인 관계를 맺어 동맹을 강화하였습니다.

무령왕(501~523년)은 중국 남조 양과의 교류를 강화하고, 22 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이후 성왕(523~554년)은 백제를 중흥시키기 위해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꿨습니다. 또 중앙 관청을 22부로 늘리고 수도를 5부, 지방을 5방으로 정비하였습니다.

신라와 연합한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되찾았지만, 신라 진흥왕의 배반으로 한강을 다시 빼앗기면서 나·제 동맹은 결렬되었습니다. 백제의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했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결국 전사하였습니다.

좌측부터 무령왕의 모습과 백제의 22담로, 출처 : 공주시와 STB상생방송

 

신라의 발전과 역사

신라의 눌지왕은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나·제 동명을 결성하고(433년), 소지왕은 백제 동성왕과의 혼인 동맹으로 결속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지증왕(500~512년)은 왕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국호를 사로국에서 신라로 바꾸었으며, 이사부를 파견하여 우산국(울릉도)을 복속하였습니다. 또한 우경을 장려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수도에 시장인 동시를 열고 감독 기관인 동시전을 설치하였으며, 순장을 금지하였습니다.

이후 법흥왕(514~540년)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 17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였습니다. 또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고 '건원'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하였습니다.
진흥왕(540~576년)은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하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어서 대가야를 병합하고  함흥 평야까지 영토를 넓히는 등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영토 확장을 기념하여 단양 신라 적성비와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의 순수비를 세웠습니다.

좌측 상단부터 단양 신라 적성비,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후기 가야의 발전과 역사 그리고 멸망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공격과 백제와 신라의 팽창으로 김해의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5세기 후반에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 연맹이 성립하였습니다. 후기 가야 연맹은 철기 문화를 계속 발전시켜 갑옷과 무기를 제작하였으며, 금동관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대가야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었지만,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금관가야는 신라 법흥왕에게 멸망하였고(532년), 대가야는 신라 진흥왕에게 멸망하였습니다.(562년)

가야의 변천 과정
2~3세기경 금관가야 중심으로 발전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압박으로 위기 - 5세기 이후 대가야 중심 발전 - 6세기 중엽 신라에 통합

좌측부터 가야의 금동관과 철제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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