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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고조선의 성립과 여러 국가의 등장

by EDMBLACKBOX 2021.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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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고조선 건국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시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단군 이야기에는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어 있기도 합니다.

단군 이야기에 의하면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의 자손이라고 믿는 선민사상을 가진 단군이 이끄는 집단이 주변 부족을 정복하거나 연맹을 맺으면서 세력을 확대하곤 하였습니다.

고조선은 환웅 부족과 곰 부족이 연합하여 탄생한 국가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라는 홍익인간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습니다. 또 풍백(바람), 우사(비), 운사(구름) 등의 존재를 통해 농경 사회였음을 알 수 있었고, 지배자인 단군왕검(단군은 종교 지배자인 제사장, 왕검은 정치 지배자인 군장을 의미)이란 호칭을 통해 제정일치 사회였음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이미지, 출처 : 위키페디아

 

고조선의 발전과 성장

고조선은 랴오닝(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한반도 북부와 대동강 유역까지 세력 범위를 확대하였습니다. 비파형 동검과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식 토기 등의 분포 지역을 통해 고조선의 문화 범위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랴오닝 지방 위치, 출처 : 위키페디아

고조선은 일찍부터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데 힘을 썼고, 대외적으로는 랴오허 강(요하)을 경계로 중국의 연과 대립할 정도로 강성해졌습니다. 그러나 연의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아 2000여 리에 이르는 요동 지역을 상실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기원전 300년경),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과 준왕 등으로 왕위 세습이 이루어졌고 상, 대부, 장군 등과 같은 관직을 두었습니다.

위만 조선의 성립, 고조선 사회상 모습

위만은 중국 연나라 사람으로, 중국의 진·한 교체기에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게 서쪽 변경의 수비 임무를 맡겼고, 이후 위만은 세력을 확장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습니다.(기원전 194년)

위만 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철제 무기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또 한반도 남부의 진과 중국의 한 사이에서 중계 무역으로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었습니다. 고조선이 강성해지고 흉노와 연결하여 한을 경계하자, 한 무제는 고조선을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조선상 역계경은 한과의 화친을 주장하였으나 우거왕이 듣지 않자 주민 2,000여 호를 거느리고 진국에 망명하였습니다. 고조선은 1년여 동안 완강히 저항하였지만, 지배층의 내분으로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은 고조선 일부 지역에 4개의 군현(낙랑, 임둔, 진번, 현도)을 설치하였습니다.

고조선의 사회 모습은 현재 3개 조항만 전해지고 있는 범금 8조를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고조선의 생명 존중, 노동력 중시, 농경 사회, 사유 재산 보호, 화폐 사용, 형벌과 노비 존재 등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조선은 비교적 평온한 사회였으나 한에 의해 4개의 군현이 설치되면서 풍속이 각박해져 법 조항이 60여 개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위만 조선과 한 등 주변국들, 출처 : 위키페디아

고조선의 주요 인물과 활동

인물 활동 내용
진개 연나라의 장군으로 고조선에 침입하여 2천여 리의 영토를 빼앗았습니다.
부왕, 준왕 3세기 고조선의 왕으로 고조선에서 왕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왕위를 상속했음을 보여줍니다.
위만 진·한 교체기에 중국에서 와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습니다.
우거왕 위만의 손자로 고조선의 마지막 왕입니다. 한의 침입에 왕검성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살해당했습니다.
조선상 역계경 한나라의 군대가 왕검성을 포위한 가운데 전쟁이 길어지자 강화를 맺자고 건의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2000여 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망명한 인물입니다.
니계상 참, 조선상 노인 한의 침입 때 한과의 화친을 주장한 인물들로 조선상 노인은 먼저 항복하였고 니계상 참은 자객을 보내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에게 항복하였습니다.
대신 성기 우거왕 살해 이후에도 끝까지 왕검성에서 한과 싸웠던 인물입니다.

 

고조선의 성장과 발전 내용

구분 내용
건국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건국하였습니다.
건국 이야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 동국여지승람에 수록
선민사상 : 환웅(하늘에서 내려옴)
농경 사회 : 풍백(바람), 우사(비), 운사(구름) 등 기후와 관련있는 신
홍익인간 :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지배층의 통치 이념
부족 연맹 : 환웅 부족과 곰 부족 결합의 연맹 국가(호랑이 부족 도태)
제정 일치 사회 : 단군(제사장), 왕검(정치적 군장)
사유 재산제 성립 - 계급 분화와 지배층 등장
세력 범위 랴오닝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 - 한반도 북부와 대동강 유역까지 세력 범위 확대
탁자식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의 분포 지역을 통해 문화 범위 추정
발전 랴오허 강을 경계로 중국의 연과 대립 - 연의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아 영토 상실
기원전 3세기경 부왕에서 준왕으로 왕위 세습
상, 대부, 장군의 관직 체계 마련
위만 조선 위만 조선 성립(기원전 194) :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름
경제 : 철기 문화 본격 수용, 한과 한반도 남부의 진 사이에 중계 무역
멸망 : 한 무제의 침입으로 왕검성 함락(기원전 108)
- 고조선 지역에 4개 군현 설치(한군현 : 낙랑, 임둔, 진번, 현도)
사회 모습 범금 8조 : 현재 3개 조목의 내용만이 남겨짐
(생명 존중, 노동력 중시, 농경 사회, 사유재산 보호, 화폐 사용, 형벌과 노비 존재)
- 한 군현 설치 후 풍속이 각박해져 조항이 60여 개로 늘어남

 

부여의 건국, 사회상

철기 문화가 확산되면서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건국되고 성장하였습니다. 부여는 만주 송화강 유역에서 5 부족이 연합하여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농경과 목축이 함께 발달하였으며 특산물로 말, 주옥, 모피 등이 생산되었습니다.

왕은 중앙을 다스리고 마가, 우가, 구가, 저가 등의 4부족장은 지방 행정 구역인 사출도를 다스렸습니다. 부족장들은 왕을 추대하기도 하고, 흉년이 들거나 전쟁에서 패하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물어 왕을 폐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왕이 죽으면 왕을 따르던 사람들을 죽여 껴묻거리(죽은 자를 매장할 때 함께 묻는 물건 등)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 취수제라는 풍습이 있었고 1 책 12 법이라는 엄격한 법도 있었습니다.

원삼국 시대의 지도와 형사 취수제에 대한 내용

매년 12월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소를 죽인 뒤 그 굽으로 점을 치는 우제점법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건국, 사회상

고구려는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에 의해 졸본 지역에 나라가 세워졌고, 2대 유리왕 때 도읍을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으로 옮겼습니다. 그 후 옥저와 동예를 압박하여 공납을 받았고, 세력을 서쪽으로 확장하여 랴오둥(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습니다.

5 부족 연맹을 바탕으로 발전한 고구려에는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고, 이들은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습니다. 고구려는 귀족 회의인 '제가 회의'에서 국가 중대사나 범죄자에 대한 사형 등을 결정하였고, 부여와 마찬가지로 1 책 12 법이 존재했습니다.

고구려의 풍습으로는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의 뒤꼍에 작은 집을 짓고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거주하는 데릴사위제(서옥제)와 형이 죽으면 형수를 부인으로 삼는 형사 취수제가 있었습니다. 매년 10월에는 도읍의 동쪽에 있는 큰 동굴인 국동대혈에 모여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습니다.

고구려의 동맹(제천 행사)

 

옥저와 동예의 발전, 사회상

옥저는 함경도 해안 일대, 동예는 강원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하여 소금과 어물 등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옥저와 동예는 읍군, 삼로라는 군장이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고구려의 압박으로 연맹 왕국이 발전하지 못하고 고구려에 공납을 바치다가 결국 고구려에 정복되었습니다.

옥저는 남자 집에 장차 며느리가 될 어린아이를 데려와 성장할 때까지 키운 뒤 신부 집에 예물을 주고 혼인시키는 민며느리제(예서제)와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나중에 뼈를 추려 가족 공동 무덤인 목곽에 안치하는 골장제 풍습이 있었습니다.

동예는 다른 부족과 혼인을 하는 족외혼을 엄격히 지켰고, 다른 부족의 경계를 함부로 침입하면 노비, 소, 말 등으로 배상하는 '책화'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특산물로는 단궁(활), 과하마(키가 작은 말), 반어피(바다표범 가죽) 등이 있었습니다. 또 매년 10월에는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옥저의 민며느리제,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삼한의 성장, 사회상

고조선이 발전하고 있을 때 한반도 남부에는 일찍부터 진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철기 문화를 지닌 유이민이 대거 남하하면서 진의 토착 세력과 결합하여 한반도 남부에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형성되었습니다.

삼한 중 마한은 54개,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마한의 소국 중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삼한 전체를 이끌었습니다. 삼한은 신지, 읍차로 불리는 정치적 지배자인 군장과 천군이라는 종교 지배자가 별도로 존재하는 제정분리 사회였습니다. 종교 지배자인 천군은 제사를 주관하며 신성 구역인 소도를 다스렸습니다.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범죄자가 도망하여 소도로 들어가면 잡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삼한은 비옥한 평야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 벼농사가 발달하였습니다. 삼한 중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과 왜 등에 수출하였고 교역에서는 철을 화폐처럼 사용하였습니다. 삼한 사람들은 초가지붕의 반 움집이나 큰 통나무를 이용한 귀틀집, 흙으로 지은 토실 등에서 거주하였으며, 두레와 같은 조직을 통하여 공동 작업을 하였습니다.

삼한에서는 씨를 뿌리는 5월에는 수릿날, 추수를 마친 10월에는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삼한의 대략적인 위치, 출처 : 위키페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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