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한국사

조선시대 사림의 성장과 성리학적 질서의 확산

by EDMBLACKBOX 2021. 10. 3.
반응형

조선 제 9대 국왕, 성종

사림(士林)의 등장

고려 말 등장한 신진 사대부는 조선 시대에 와서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계유정난(1453년)을 계기로 등장한 세조의 공신(정난공신, 좌익공신)들을 훈구 세력이라고 합니다. 훈구 세력의 기원은 고려 말 조선 건국을 주도한 급진적인 사대부 계열의 공신들로 조선 건국과 조선 초기 문물 정비에 적극 참여한 세력입니다. 이들은 고위 관직과 많은 토지를 세력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실권을 세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종은 세력이 커진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세력을 대거 등용하였습니다. 사림은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정몽주의 후학으로 성리학의 이념에 투철한 중소 지주 출신으로, 지방에서 학문과 교육에 힘쓰면서 향촌 사회의 지배층으로 자리 잡은 세력이었습니다.

 

* 역성혁명 : 왕조가 바뀌는 것을 일입니다. 왕조에는 세습되는 통치자의 성(姓)이 있으므로 새 왕조를 세움으로써 통치자의 성이 바뀌게 되는 일입니다.

 

사림들은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 훈구 세력과는 달리 향촌 자치와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습니다.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주로 전랑과 언론 3사에 배치되어 훈구 세력의 권력 독점과 비리를 비판하고 견제하였습니다. 성종은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을 중용하여 우대함으로써 양 세력 간 균형이 형성될 수 있었지만, 훈구 세력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림을 부정적으로 바라봤으며, 성종 사후 두 세력 간의 갈등은 4차례 사화로 표출되었습니다.

 

 

훈구파와 사림파 비교하기

구분 15세기 훈구파 16세기 사림파
근원 고려 말 급진 사대부(역성 혁명 참여) 고려 말 온건 사대부(정몽주의 후학)
학문적 성향 사장(문학) 중시 경학(경전) 중시
주장 중앙 집권, 부국강병 추구 향촌 자치, 왕도 정치 주장
관직 진출 의정부, 6조 전랑과 3사의 언관직
사상 성리학 이외 사상에 대해 관용적 성리학 이외 사상에 대해 배타적
교육 성균관, 집현전 서원
경제적 기반 대농장 소유 중소 지주적 기반
영향 15세기 문물 제도 정비에 기여 성리학의 이기 철학 발달에 기여

 

 

사화의 발생

사림을 우대하던 성종이 사망한 후 즉위한 연산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훈구와 사림을 억누르고자 하였고, 특히 언론 활동으로 자신을 비판하는 사림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성종실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림 출신인 김일손이 자신의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포함시키자, 훈구파인 유자광과 이극돈이 이를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이라며 김일손과 사림파를 공격하여 '무오사화'가 발생하였습니다(1498년). 이 사건으로 김종직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김일손 등 많은 사림이 죽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 씨 사사 사건'과 관련하여 발생하였습니다. 윤 씨는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낸 것이 문제가 되어 폐비가 된 후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연산군의 측근인 임사홍이 이 문제를 연산군에게 거론하였습니다. 이에 연산군은 폐비 윤 씨 사건과 관련된 훈구파와 평소 자신에게 비판적이던 사림까지 대거 제거하였는데, 이를 '갑자사화'라고 합니다(1504년).

 

두 차례 사화 이후에도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훈구 세력은 반정(중종반정, 1506년)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을 옹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종은 반정 공신 세력(정국공신)이 강해지자 사림을 기용하여 견제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사림의 중심인물인 조광조가 등용되어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조광조는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 세력을 정계에 진출시켰고, 도교 기관인 소격서를 혁파하고 향약의 실시와 공납제의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중종반정 때 훈구 세력의 공을 재심사하여 일부 훈구 세력의 공훈을 삭제하고자 하였습니다(위훈 삭제 사건).

 

그러자 위기를 느낀 훈구 세력이 강하게 반발하였고, 조광조의 개혁에 부담을 느낀 중종이 조광조를 유배 보낸 후 사사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고 합니다(1519년). 이후 훈구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는 가운데 인종의 외척(윤임-대윤)과 명종의 외척(윤원형-소윤) 사이의 대립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합니다(1545년). 이렇게 네 차례 사화를 통해 사림들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향촌에서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꾸준히 세력을 키워 16세기 이후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4대 사화 정리

4대 사화 원인
무오사화(연산군, 1498년)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방한 것이라 하여 사림이 화를 입었습니다.
갑자사화(연산군, 1504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입니다.
기묘사화(중종, 1519년) 조광조의 급진 개혁 정치와 중종반정 공신에 대한 위훈 삭제 문제로 훈구파가 반발하였습니다.
을사사화(명종, 1545년) 인종의 외척인 윤임(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소윤)의 대립입니다.

 

 

조선시대 붕당, 동인과 서인

붕당의 형성

선조 즉위 후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지만, 결국 사림 세력 간에 권력을 두고 대립이 발생하였습니다. 명종 때 중앙 정계에 진출한 선배 사림은 척신 정치 잔재 청산에 대해 비교적 소극적 입장이었으나, 선조 때 새롭게 진출한 후배 사림들은 척신 정치 잔재 청산에 적극적 태도를 표방하면서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사림 세력이 분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두 세력은 하급 관리에 대한 인사권과 3사 관리를 추천하는 권한을 가진 이조 전랑 임명 문제로 대립하였습니다. 이렇게 두 세력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선배 사림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고, 후배 사림을 중심으로 동인이 형성되어 동·서 붕당이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붕당의 형성 배경은 정치적 입장뿐 아니라 학문적, 지역적 차이에도 있었습니다.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제자들인 영남 사림들이 먼저 동인을 형성하여 척신 정치의 잔재를 철저히 배척하고 정치의 도덕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이와 성혼의 제자인 기호 지방 사림들이 참여하면서 형성된 서인은 척신이라도 믿을만한 인물과는 협력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에 의해 결집되어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으며, 상대 당의 학문적 차이를 인정하면서 비판과 견제를 통하여 붕당 정치를 전개하였습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