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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2편

by EDMBLACKBOX 202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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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코 잉카의 아들이자 1571~1572년 재임한 잉카의 마지막 황제인 투팍 아마루

정복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사회를 냉혹하고 원시적인 비문명 사회로 낙인찍어 멕시코에서처럼 전면전과 잔혹한 살상을 서슴지 않은 건 물론, 원주민 고유의 특징들을 지워버리고자 기를 썼습니다. 현지 종교 시설을 파괴하고 기존의 관행은 근절시켰습니다.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선택할 수 있었지만 정식 승인된 종교는 기독교뿐이었습니다.

 

오스만과 무굴, 만주족이 정복했을 때에도 다른 종교 관행들이 이어지기는 했지만 유라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종교는 갈등의 원인이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인과 그들 후손의 수는 원주민 부족 인구를 결코 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 이교도들과 끝없이 전쟁을 벌이고 원주민에 대한 지배력을 이용하여 토착 귀족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한편, 협조적 원주민들에게 상당한 영토를 넘겨주었습니다. 무굴제국도 인도 북부를 정복했을 때 비슷한 방식을 활용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톨릭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활동인 레공키스타

스페인은 기독교로의 개종을 우월함의 증거이자 정복의 정당한 명분, 지배를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토착 문화가 이를 테면 인도보다 더 심하게 파괴됐고, 그렇지 않아도 질병으로 혼란에 빠진 원주민 사회는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레공키스타에서 영감을 받은 완전한 정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스페인의 지배는 서구 역사의 특징과 16세기 대중문화와 결합해 더 잔혹해졌습니다. 오스만 제국으로 부활한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 세력을 공격하고, 종교개혁으로 기독교도들 간에 증가한 무력 분쟁 당대 스페인의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아스텍과 잉카제국은 원주민과의 불화로 놀라울 만큼 빠르게 붕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페인이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페루에서는 정복이 완료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1536년 우아스카르의 동생이자 스페인의 노리개였던 망코 잉카가 피사로에게서 달아나 20만 명 규모의 군대를 소집한 것입니다.

 

이들은 빌카밤바의 정글지대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우는데, 이 나라는 망코 잉카의 후손 투팍 아마루가 사망한 1572년까지 이어집니다. 그 밖의 지역에서도 스페인은 원주민 부족들의 반말에 직면했습니다. 각 부족들은 환경과 경제 수준, 사회 구조, 정치 조직까지 모든 게 가지각색이었는데, 콜롬비아의 산악지대에서 에메랄드를 채굴하던 무지카족처럼 수준 높은 부족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험준한 지리적 요건에 원주민의 반발까지 더해져 스페인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단 스페인 제국의 위엄

스페인 제국의 규모와 통치 방식을 보면 원주민들의 반발이 얼마나 거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칠레 중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원주민들의 저항으로 난관에 빠진 스페인은 1604년 센트럴 밸리 남부에서 결국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비오비오 강 너머 지역에서는 마푸체족이 독립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멕시코 북부에서는 치치메카족의 유목 전사들이 뛰어난 활쏘기 실력으로 스페인 기병대를 제압하자 스페인도 원주민 동맹군을 소집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렇지 않아도 오랜 앙숙이던 유목민과 정착민의 관계에 더 큰 금이 갔습니다.

 

급기야 원주민들이 스페인의 말들을 훔쳐서 타고 다니는 지경에 이르자 스페인은 노예화 및 침략 같은 공격적 정책들을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대신 뇌물 공세에 기독교 선교 활동까지 펼쳐 반감을 잠재우려 했습니다. 이후 정복자들과 피정복민들이 교류하고, 지배보다는 타협이 우선시 되는 '중간 지대'가 형성되었습니다. 멕시코 북부에서는 스페인의 정책 변화로 인해 정착촌도 늘고 요새 건설도 활성화되었습니다.

 

금괴가 매장되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멕시코에서 아메리카 내륙으로 북진하는 스페인 원정대가 늘어났습니다.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오늘날의 뉴멕시코 지역으로 진출했다가 그곳에서 1540년 그레이트 플레인스까지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금괴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멕시코에서 발견된 만큼 막대한 양의 금괴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1539~42년 미시시피 하류와 인근 지역을 잔혹하게 약탈한 에르난도 데 소토의 원정대를 마지막으로 발길이 끊어집니다. 1541년 에르난도 데 소토는 앨라배마의 모바일에서 촉토족과 전투를 벌여 승리함으로써 대평원에서는 더 많은 말을 보유한 쪽이 승기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에르난도가 사망한 이후, 154년에는 데 모스코소가 현재의 텍사스 동부로 진격합니다.

 

 

에스파냐가 취한 식민지 경영 정책이었던 레파르티미엔토

식민지 정책과 실행은 원정대가 들여온 전염병의 확산을 부추겼습니다. 플랜테이션 농업과 광산업이 경제 활동의 주축이 된 상황에서 대규모 인력이 늘 한데 모여 일하다 보니 상황이 계속 악화된 것입니다. 해결을 위해 스페인은 또다시 침략을 자행해 온두라스와 니카라과의 원주민들을 대거 노예로 데려오는 잔혹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노예 매매 이후, 어느 부족이 노예가 될 것인지를 두고 부족들 간에 갈등이 생기면서 원주민 사회에 혼란이 일었습니다. 한편, 원주민들을 노예가 아닌 기독교로 개종 예정인 시민으로 취급하라는 성직자들의 압박에 직면한 스페인 왕실은 통치 지역 내 원주민 노동력 통제와 관련된 법규를 발효했습니다.

 

1542년 신법(leyes nuevas)으로 원주민 노예제는 정식 폐지되었지만 페루의 스페인인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지역 관리와 영주들은 이런 변화를 철저하게 무시했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남아 있는 엔코미엔다 등의 종속노동과 레파르티미엔토 같은 강제 이주는 사실상 노예제나 다름없었습니다.

 

 

스페인 제국 펠리페 2세

원주민 노예는 멕시코 북부 등의 전선 지역에서 여전히 중요했지만 워낙 비싸고 공급이 적다 보니 서아프리카에서 팔려온 노예들로 대체되었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먼저 스페인으로 끌려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로 보내졌는데, 1518년부터 아시엔토(스페인어: hacienda)라는 노예무역 독점권이 생기면서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바로 보내졌습니다. 운송비용 때문에 처음에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원주민 노예보다 더 비쌌고, 그래서 부유한 집의 노예로 고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6세기 중반 들어 아프리카인들이 원주민들보다 훨씬 힘이 좋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아프리카 노예의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17세기 동안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간 아프리카 노예들이 크게 늘었지만 여전히 원주민 노예보다 비싸서 대출 서비스까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스페인은 1565년 필리핀 세부를, 이후 마닐라까지 점령해 아메리카 대륙 밖으로 식민지를 확장했습니다. 이 섬들의 이름은 태양이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의 통치자 펠리페 2세에게서 따온 것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스페인이 1519~1521년 아즈텍 문명을 정하고 1535년 잉카문명을 정복하면서 신대륙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스페인이 이권 보호를 위해 유럽에 쏟아부은 자원에 비하면 극히 일부밖에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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