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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65

아메리카의 탄생 - 유럽의 콘도미니엄이 된 신대륙 콜론이 인도를 발견했다고 흥분하며 에스파냐로 돌아오자 일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인도에 닿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콜론의 항해는 예상한 것보다 너무 짧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동방 세계에 대한 그 시대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아시아 세계와 콜론이 기술한 '인도'에 관한 내용이 매우 달랐기에 그런 의심은 더욱 커졌습니다. 이런 풍조를 잘 이용한 인물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입니다. 베스푸치는 콜론이 인디아스라고 부른 땅이 실은 인도가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대륙 인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아메리카로 굳어지는 대륙 이름 1507년 도서 박람회에서 세계 지도를 첨부한 '지리학 입문'을 펴내면서 지도 제작자 발트제.. 2021. 11. 7.
에스파냐, 잘못된 항로 선택의 결과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통치자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통치자 페르난도 2세가 혼인하면서 에스파냐는 통일 국가에 성큼 가까워졌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 후아나는 펠리페 1세와 결혼했는데, 잘 생긴 남편이 부정한 짓을 저지를까봐 늘 노심초사하다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나중에 '광녀 후아나'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에스파냐 왕에 오른 인물이 카를로스 1세입니다. 1519년에 오스트리아의 왕 카를 5세가 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하는 등 명함이 무척 많았던 왕으로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의 영광과 위기를 두루 겪었습니다. 콜론이라는 모험가의 도박이 성공을 거두다. 터키의 이스탄불은 에게해와 흑해 사이의 길목에 있는 도시로 비잔티.. 2021. 10. 6.
강력한 해양 제국, 포르투갈 지중해의 변방인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 해양 강국이 된 데는 항해왕자라고 일컬어지는 엔히크의 노력이 있습니다. 나중에 마젤란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두루 거쳐 세계를 한 바퀴 돈 것도 엔히크가 닦아 놓은 기반 때문입니다. 포르투갈 국왕 후안 1세는 1300년대 국경 분쟁에서 에스파냐를 물리치고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엔히크는 그의 아들입니다. 엔히크 왕자의 머릿속은 온통 항해에 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각지에 항해 학교, 천문대, 도서관, 항구, 조선소를 세우며 해양 강국을 향한 꿈을 불태웠습니다. 인프라가 잘 갖추어지자 유럽 각지의 고급 항해사들과 기술자들이 포르투갈로 몰려왔습니다. 선박은 장거리 항해에 적합하게 개량되고 발전되었습니다. 헤게모니를 쥘 수 있었던 포르투갈의 역사 포.. 2021. 9. 4.
예술의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는 십자군 원정의 운송권을 맡은 도시이고, 피렌체는 교회의 자금을 관리하던 도시입니다. 이 두 도시의 경제적 풍요가 르네상스의 도래를 앞당겼습니다. 역사가 부르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인류사에 커다란 의미를 주는 두 도시가 있다. 300년 동안 격동에 휘말렸던 피렌체, 그리고 외면적으로 볼 때는 정치적으로 정체한 듯 보이는 도시 베네치아가 그곳이다. 우리는 두 도시가 보여준 것보다 더 선명한 대립을 생각할 수 없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누구인가?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1389년 9월 27일 - 1464년 8월 1일)는 이탈리아인 은행가, 정치인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사실상의 피렌체 통치자로 군림했던 메디치 정치 세력의 창시자입니다. 코시모의 권력.. 2021. 8. 5.
루터 종교개혁과 인쇄술의 발달 마틴 루터에 대하여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 ~ 1546년 2월 18일)는 독일의 종교개혁가입니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으며, 훗날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고 비판했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당시 면죄부를 대량 판매하던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자 요한 테첼에 맞섰습니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오.. 2021. 6. 21.
중세시대 중앙 집권 국가 중세를 지탱하던 봉건제의 세 가지 요소는 지방 분권(정치), 장원(경제), 기사제(군사)입니다. 13세기부터 이 세 요소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귀족이 차지했던 자리에 전문 행정 조직에서 배출한 관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정해진 영토 안에 비슷한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특성을 공유하는 '국민'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입니다. 비상시를 대비한 상비군의 등장 흑사병 때문에 농민 인구가 급감하자 영주가 농노에게 노동력 제공 대신 화폐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폐쇄적 장원제가 무너지면서 경제 시스템은 개방적 경제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 같은 장기간 원정길에 오른 기사들과 봉건 제후들이 자기 영지 관리에 소홀했던 것도 장원 시스템 붕괴의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14세기 중반에 화포가 보급되.. 2021. 5. 31.
십자군 전쟁 : 천년전쟁에 대해 알아보자 십자군 전쟁 간단 요약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간헐적으로 일어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전쟁입니다. 같은 신을 섬기고 같은 성지를 공유했던 두 종교의 갈등 십자군 원정의 1차 목표는 예루살렘 수복이었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성지 순례를 다녀오면 죄를 일부 씻어낼 수 있다고 믿었기에 길고 험한 고행 길을 선뜻 자처했습니다. 순례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예루살렘이었지만 그 길목의 주인은 638년 이래로 이슬람 사람들이었습니다. 11세기 후반에 셀주크 제국이 세력을 넓히면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일대를 점령했습니다. 투르크인들은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순례에 오른 그리스도교도에게 통행료를 받았습니다. 신성한 행위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태도에 유럽인들의.. 2021. 5. 20.
비잔틴 세계 - 유럽을 지키려는 몸부림 현재의 그리스, 터키, 중동, 이집트 지역에 걸쳐 있던 동로마제국은 유럽의 수호자로서 동방 세력의 수많은 침입을 막아내면서 천 년 넘게 존속했습니다. 동로마가 그보다 일찍 무너졌다면 오늘날 유럽의 지형도와 문화는 무척 달라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로마'라든지 '비잔틴제국'이라는 표현은 모두 역사가들이 편의상 붙인 용어로,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제국을 그냥 '로마' 또는 '새로운 로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동로마제국 역사의 진실과 거짓 비잔틴제국의 수도인 비잔티움(이스탄불)은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였는데 그리스의 정복자 '비자스'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에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도시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었습니다. 비잔티움의 형용사형인 비잔틴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2021. 5. 3.
로마 종교 역사(Feat. 아비뇽 유수, 카노사의 굴욕)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포용한 까닭은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 통합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시대의 왕과 황제들이 그리스도교와 협력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세속 권력과 보편 종교를 지향하는 로마 교회는 상호 협조했으나, 교회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둘 간의 제휴 관계에는 결국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391년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로마 교회는 불과 두 세기도 지나지 않아 결정적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으로 분할 통치되던 로마의 서쪽에는 게르만족의 영향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476년 게르만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의 침략으로 서로마제국은 패망했습니다. 동방 교회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로마 교회는 서로마 붕괴 이후 더욱 위축되었고, 결국 게르만족의 힘.. 2021. 4. 24.
로마 멸망 이후 무력이 판을 치던 시대에 힘없는 농민들은 생계 수단인 가축과 농작물을 약탈당할까 봐 항상 두려움을 달고 살았습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힘 있는 사람에게 양도하고 그 대가로 그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권리와 군사적 보호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봉건제의 시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농으로서 불안하게 토지를 소유하는 것보다 농노로서 안정적이고 위협 없이 토지를 소작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농민들은 판단한 것입니다. * 봉건제는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아시아의 국가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제도였습니다. 안정을 추구했던 중세인들 농민이 영주에게 바치거나 영주가 왕에게 바친 토지를 '봉토'라고 부릅니다. 왕은 영주에게 이 토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이용 권한을 하사하고 영주는 다시 농민에게 .. 2021. 4. 19.
안데스 문명 : 잉카에 대하여 잉카는 고대 문명이 아니라 1400년대부터 1500년대까지 짧게 존속한 제국 이름입니다. 안데스 문명의 일부인 잉카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잉카가 아닌 티완틴수요라고 불렀습니다. 잉카 제국은 에스파냐인들이 붙인 명칭으로, 잉카는 원래 통치자의 고유한 이름이었습니다. 잉카 제국 타완틴수유(Tawantinsuyu)는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입니다. 제국의 군주 칭호는 사파 잉카라 했으며, 이 군주 칭호를 따서 서양에서는 잉카 제국(Inka Empire)이라 일컬었습니다. 잉카 제국의 행정, 정치, 군사의 중심은 지금의 페루인 쿠스코입니다. 이 제국은 13세기 초 페루의 한 고원에서 기원했으며, 1438년에 본격적으로 역사시대를 맞이합니다. 1438년부터 1533년까지 약 95년 동안 .. 2021. 4. 3.
로마제국의 사회상 고대 그리스가 영웅과 천재의 힘으로 찬란한 시대를 열었다면 로마는 잘 짜인 조직, 즉 체제를 바탕으로 오랜 세월 동안 유럽의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엄격한 징병제와 공정한 법률 집행, 합리적 관료제가 제국의 영광을 떠받쳤습니다. 로마제국의 병역제도 로마제국은 출신 성분보다는 현재 로마제국 시스템을 중시했습니다. 어디 출신인지 따지지 않았고 이민족을 로마인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재 채용에서도 개인의 특출한 개성이나 역량보다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다른 구성원과 쉽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적응력이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로마의 집정관으로 지낸 마르쿠스 카토(기원전 234~149)는 로마인의 속성을 이렇게 파악했습니다. "로마인은 각기 개성이 무척 다르다. 그러나 무리로 있을 때.. 2021. 3. 23.
로마의 중요 전쟁 역사 간단 요약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100년 이상을 끌던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무찌르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로마는 대외적으로 강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그 점이 오히려 로마를 병들게 했습니다. 기원전 1세기의 역사가인 살루스티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를 거치며 코린트와 카르타고 같은 주변 강대국들은 모두 제압했기에 로마는 오히려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로마가 내부 갈등에 빠져 있을 때 외부에서는 반 로마 세력이 결집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비해 차별을 받던 8개 도시국가들이 독자 국가를 수립한다는 목표 아래 연합해 기원전 91년에 이른바 '동맹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합을 '이탈리아'라고 불렀습니다. 전반에는 동맹시들이 우세를 보였지만 전쟁은 로.. 2021. 3. 12.
모든 학문이 탄생한 그리스 시대 학문의 뜻을 사전적 뜻을 살펴본다면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힘. 또는 그런 지식 의미합니다. 어찌 보면 기원전 7세기에 살았던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선언한 때부터 학문의 전진이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학자들이 탐구한 주제를 이미 이집트 사람들을 비롯해 이전 시대 사람들이 제기했음에도 그리스가 학문의 진정한 탄생지인 이유는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학문 풍토를 이루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탈레스는 신화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을 있는 그대로인 물질로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근본 물질이 있다면 그건 한계가 없는 것, 즉 '무한정자'라고 주장했고, 아낙시메네스는 근본 물질이 뭔지 탐구하기보단 농축과 분산이라는 물질의 결합 원리를 아는 .. 2021. 2. 28.
마야 문명과 옥수수 마야 문명은 기원전 1500년 무렵 발흥하여 1500년대 중반까지 존속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야가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로 활용되는 이유는 아마도 마야 달력 때문일 겁니다.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각종 재난 영화들의 종말론은 마야 달력에 근거를 둔 것인데, 마야 달력을 현재 우리가 쓰는 달력으로 변환해 보면 2012년 12월 21일 또는 23일경에 시간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철저히 현실 지향적이었던 마야인들의 세계관에 비추어 보건대 어떤 의도를 갖고 종말 시점을 적은 건 아니었으며 수천 년 뒤의 일까지 관여할 능력이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마야 문화에 대한 진실 1562년 유카탄 반도의 가톨릭 주교로 임명된 디에고 데 란다의 임무는 원주민을 가톨릭교도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란다 주교는 마야 문자를.. 2021.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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