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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에스파냐, 잘못된 항로 선택의 결과

by EDMBLACKBOX 2021.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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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왕국 후아나 공주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통치자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통치자 페르난도 2세가 혼인하면서 에스파냐는 통일 국가에 성큼 가까워졌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 후아나는 펠리페 1세와 결혼했는데, 잘 생긴 남편이 부정한 짓을 저지를까봐 늘 노심초사하다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나중에 '광녀 후아나'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에스파냐 왕에 오른 인물이 카를로스 1세입니다. 1519년에 오스트리아의 왕 카를 5세가 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하는 등 명함이 무척 많았던 왕으로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의 영광과 위기를 두루 겪었습니다.

 

 

콜론이라는 모험가의 도박이 성공을 거두다.

터키의 이스탄불은 에게해와 흑해 사이의 길목에 있는 도시로 비잔티움 시절부터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비잔티움의 다음 이름이자 이스탄불의 전 이름인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곳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이름 붙인 것인데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유럽은 동방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신비롭고 풍요로운 땅 인도로 가는 반대편 길을 발굴해야 했습니다.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는 1497년이 돼서야 겨우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 하나를 개척했습니다.

 

대서양 항로의 개척자인 포르투갈과 후발 주자인 에스파냐는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1479년 알카소바스 조약을 맺었습니다. 에스파냐는 포르투갈이 이미 개척한 항로를 침범하지 못하며,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의 새 항로 개척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콜론이 아메리카를 발견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콜론과 에스파냐 왕실은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예측하기 힘든 무모한 결정을 내렸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알카소바스 조약은 여러모로 포르투갈에게 유리한 조건이 많았기에 엄밀히 따지면 콜론이 발견한 땅도 포르투갈의 기존 관할 구역 안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 왕이 교황청에 로비를 펼친 덕에 교황 칙서로 에스파냐 소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대서양의 패권 향방이 에스파냐 쪽으로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포르투갈은 무척 후회했을 것입니다. 에스파냐 왕실에 제안하기에 앞서 1484년에 후안 2세에게 콜론의 투자 제안서가 먼저 제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포르투갈이 당시에 그 제안을 거절한 건 콜론의 제시 조건이 너무 까다롭고 계획도 황당무계했기 때문인데, 이사벨라 1세 역시 제안 내용을 처음 듣고는 바로 거절했으며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까지는 5년 이상이나 걸렸습니다.

 

1492년에 봄에 맺은 산타페 조약에서 에스파냐 왕실이 콜론에게 약속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기사 작위 수여

- 귀족의 영예를 후손에게 승계

- 해군 제독으로 임명

- 식민지 총독으로 임명

- 식민지 통치 독립 보장

- 향후 개척하는 모든 지역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10퍼센트 제공

- 식민지에 정박하는 모든 선박에 세금 징수 가능 등

 

언뜻 콜론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것처럼 보이는 조건을 이사벨라 1세는 받아들였습니다. 콜론 원정대는 1492년 11월 카리브해의 작은 섬에 도착한 이래 모두 네 번에 걸친 원정으로 바하마 제도, 쿠바, 아이티, 도미니카,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발견하여 식민 제국 시대의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에스파냐의 패권은 잉글랜드로 가다.

1500년대를 찬란하게 열어젖힌 에스파냐의 자신감은 해상 전투의 높은 승률로 이어졌습니다. 스페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명이기도 한 '무적함대'는 1500년대의 해군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막강한 해군력을 갖춘 에스파냐는 베네치아 해군과 연합하여 1571년 지중해 남동부 레판토 만에 정박 중인 숙적 오스만 제국의 함대까지 격파하였습니다. '돈 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도 이 전투에서 싸웠습니다. 에스파냐의 함대가 무적으로 불린 것은 주변의 유리한 조건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카를로스 1세가 각국과 치른 전쟁 때문에 다른 국가들은 회복할 여력이 필요했고, 가장 큰 위협이었던 오스만 제국은 왕위 계승 투쟁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에스파냐는 도전자 없는 챔피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588년에 잉글랜드로 출정하던 에스파냐 해군의 칭호는 '라 그란데 이 펠리치시마 아르마다'였습니다. 에스파냐와 가톨릭 세계에 정면으로 맞선 잉글랜드를 가볍게 무너뜨리고, 내친김에 독립 투쟁을 벌이는 네덜란드까지 진압하고 돌아오려던 펠리페 2세의 계획은 1588년의 전투가 처참한 패배로 끝나면서 꺾여버렸습니다. 필연적 발견이란 행운을 거머쥐었던 에스파냐의 식민지 아메리카에 잉글랜드의 마수가 뻗칠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 역시 필연적 숙명이었습니다.

 

 

작품명 : 아르마다의 패배, 루터버그 그림

1588년의 칼레 해전

1588년에 벌어진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잉글랜드 왕국 함대의 해전을 바로 칼레 해전이라고 합니다. 영국과 스페인 전쟁(1585~1604)의 주요 전투입니다. 영국의 해적이자 제독인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활약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 함대는 와해되어 퇴각하다가 큰 손실을 보았고, 결과적으로 레판토 해전 이후 승승장구하던 스페인 함대의 영국 침공은 좌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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