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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예술의 르네상스 시대

by EDMBLACKBOX 2021.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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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는 십자군 원정의 운송권을 맡은 도시이고, 피렌체는 교회의 자금을 관리하던 도시입니다. 이 두 도시의 경제적 풍요가 르네상스의 도래를 앞당겼습니다. 역사가 부르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인류사에 커다란 의미를 주는 두 도시가 있다. 300년 동안 격동에 휘말렸던 피렌체, 그리고 외면적으로 볼 때는 정치적으로 정체한 듯 보이는 도시 베네치아가 그곳이다. 우리는 두 도시가 보여준 것보다 더 선명한 대립을 생각할 수 없다."

 

독재자 코시모 메디치

코시모 데 메디치는 누구인가?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1389년 9월 27일 - 1464년 8월 1일)는 이탈리아인 은행가, 정치인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사실상의 피렌체 통치자로 군림했던 메디치 정치 세력의 창시자입니다. 코시모의 권력은 은행가로서 비롯한 그의 엄청난 재력을 통해 생겨난 것이며, 그는 교육과 예술, 건출 분야의 대 후원가이기도 하였습니다. 코시모는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 등의 예술인들과도 정다운 이야기를 자주 나눔으로써 예술 공부도 하였습니다.

 

 

독재자 코시모 메디치의 예술 사랑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주민을 위해 '꽃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도시 플로렌티아를 세웠습니다. 완벽한 계획도시로 건설된 플로렌티아는 도로나 상하수도, 공중목욕탕, 포룸, 반원형 극장, 원형 경기장을 두루 갖춘 작은 로마였습니다. 흔히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문예 부흥을 이끌었다고 말하는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미 메디치가 등장하기 이전에 적어도 피렌체의 경제력은 충분히 막강했습니다. 피렌체는 17세기에 전 세계의 상권을 주물렀던 소국 네덜란드의 롤 모델이었습니다.

 

피렌체는 정치적으로 극렬한 내분을 겪다가 1434년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가 권력을 잡으면서 비로소 안정되었습니다. 독재자 코시모가 예술과 학문을 사랑한 합리적 지도자였던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코시모는 능력에 따라 인재를 채용했고, 누진세를 채택하여 자신을 포함한 부유층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었습니다. 피렌체는 통계의 도시였습니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거래와 행정 기록이 통계로 남아있을 정도였습니다.

 

41년 파도바 이민자들이 세운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권력 투쟁이 극심했던 피렌체에 비해 정치적으로 평온했습니다. 베네치아에는 언론, 출판, 사상의 자유를 중시하는 유구한 전통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금서 목록에 오른 루터나 마키아벨리의 책을 베네치아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동로마가 멸망하고 그리스 학자들이 베네치아로 대거 망명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상업의 촉진과 공화국의 번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네치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유행했습니다.

 

"베네치아인이 먼저, 그리스도교 신도는 그다음."

 

베네치아 사람들은 늘 실용을 추구하였습니다. 117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 상인을 배척하는 폭동이 일어난 것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에서 파렴치한 인물로 묘사한 샤일록 같은 상인은 베네치아에 실제 존재했을 것 같습니다. 노골적인 이해타산 역시 베네치아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한 상인은 유언장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국가에 탄원합니다. 내 자식들이 안정된 수익을 내는 정규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면 금화 1천 굴덴을 벌금으로 물리십시오."

 

베네치아의 출판업자들 역시 실용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쓰이던 유려하고 고상한 고딕체를 버리고 읽기 좋은 이탤릭 서체를 고안하여 보급했습니다. 더 많은 독자들에게 더 많은 책을 판매하기 위한 실용 전략이 결과적으로 지식 보급과 문맹률 감소, 그리고 문예 부흥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리알토 본섬

베네치아와 르네상스 그리고 중세와 근데

베네치아는 모든 상선을 국유화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본이 별로 없는 사람들도 누구나 이 상선을 대여해 사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는 오늘날 주식과 비슷한 '콜레간차' 제도를 운영하여 시민 누구나 원하는 금액을 상선에 투자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베네치아인은 다른 무엇보다 상업적 이익을 중시하여 '전쟁 사업'에도 참여했으나 모든 삶을 시장의 논리에만 맡기지는 않았습니다. 개처럼 번 돈을 정승처럼 썼습니다. 베네치아는 유족연금을 탄생시킨 도시입니다. 가장이 사망하면 국가는 유족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했습니다. 국가는 식량 창고를 매달 철저히 점검하여 최저 확보량 이상을 늘 유지했습니다. 그 덕분에 이 나라에는 한 번도 기근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투에서 부상당한 적군도 모두 국비를 들여 치료해 주었습니다.

 

역사가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에 이미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중세와 단절한 '근대의 봄'이라 불렀습니다. 마지막이면서 시작인 그 역설적인 시기에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꽃이 피었습니다.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과 가능성을 실험하는 데는 돈이 듭니다. 부를 쌓은 사람들이 그 실험을 후원하면 경제적 근심을 던 학자, 기술자, 예술가는 마음껏 새로운 영역을 개척합니다.

 

그 새로운 세계는 많은 부를 창출하며 자비로운 후원자를 합리적 투자자로 변화시킵니다. 재생과 부활을 의미하는 르네상스는 단순한 과거 회귀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선순환에서 나온 달콤한 열매입니다. 꽃의 도시와 물의 도시가 강력한 경제력으로 그 결실을 이루어냈던 것입니다.

 

 

콜레간차란 무엇인가?

베네치아는 통상을 주로 하는 도시국가입니다. 해양 통상 도시국가로서 베네치아는 모든 정책의 중심을 경제 발전에 두었습니다. 또한 베네치아의 여러 제도는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현대 국가들이 갖고 있는 여러 제도들과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콜레간차'라는 합리적인 융자 제도가 있었습니다. 자본가가 전체 자본의 3분의 2를 대고, 경영자(선장이나 선원들)가 3분에 1을 대서 이익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본가는 전액을 출자하고, 경영자는 출자하지 않지만 이익이 나오면 4분에 1을 갖고, 자본가는 4분의 3을 갖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자본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편했고, 자본을 내는 쪽에서도 위험을 분산한다는 측면에서 환영받았습니다. 또한 소자본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투자의 기회를 주어서 이익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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