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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루터 종교개혁과 인쇄술의 발달

by EDMBLACKBOX 2021.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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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Martin Luther)

마틴 루터에 대하여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 ~ 1546년 2월 18일)는 독일의 종교개혁가입니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으며, 훗날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고 비판했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당시 면죄부를 대량 판매하던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자 요한 테첼에 맞섰습니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오직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성서에 어긋나는 가르침들을 거부하였습니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당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당시 종교와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인쇄 기술이 발달한 중세 이후 시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있을 때 도이칠란트의 수도사 루터는 인간 구원을 향한 새로운 항로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이해관계가 판이하게 달랐던 귀족과 민중 그리고 종교 개혁가들을 한데 묶어주어 가톨릭 세계를 변화시킨 원동력은 새로운 인쇄 기술이었습니다. 1450년경 고안된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술은 30년 만에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대중화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지만, 1500년대가 되면 누구든 돈만 지불하면 인쇄물을 마음껏 복사할 수 있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10년의 연구 끝에 1516년에 라틴어 번역과 주해를 단 그리스어 성서를 펴냈습니다.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 가장 훌륭하고 유명한 인문주의자라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 성서 완역이라는 어려운 지적 과업을 훌륭하게 해냈을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폭넓은 계층의 독자들까지 확보하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인쇄술 덕분이었습니다.

 

활판 인쇄는 금속 활자와 인쇄기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금속에 잘 붙고 종이에 잘 찍히며 금세 마르는 잉크 기술이 없다면 문서를 두장도 못 찍습니다. 네덜란드 장인들이 잉크 기술을 개발해두지 않았다면 구텐베르크는 금속 활자와 인쇄기를 창고에 넣어둔 채 잉크 개발에 매달렸을 것입니다. 인쇄술은 어느 날 하늘에서 번개처럼 뚝 떨어진 발명품이 아닙니다. 그 시대가 인쇄술을 요구했고 기술자들이 그 요구에 충실히 응답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종이가 값싸게 보급되었기에 인쇄 기술 발전이 원동력을 얻었습니다.

 

1300년대까지 책 만드는 재료는 주로 양피지였는데 양이나 송아지를 도축하면 양피지는 마리당 기껏해야 4장 정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치면 성서 한 권을 퍼내려면 양을 약 3백 마리나 잡아야 했습니다. 종이는 양피지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시장에 등장하여 단숨에 시장을 독점해버렸습니다. 이 시기에 문맹률이 낮아져서 책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 말도 틀리진 않지만 반대 측면이 더 중요합니다. 책값이 싸지니까 책 수요가 늘어난 것입니다. 재미있고 풍부한 정보를 책에서 얻으려다 보니까 자발적으로 글을 깨우치는 인구가 늘어나 문맹률이 낮아진 측면도 큽니다.

 

 

진화되는 부패

성 베드로 성당 건축에 의욕을 보인 교황 레오 10세는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공사 비용을 모았습니다. 면벌부와 면죄부가 그 묘안이었는데 천국행 급행열차표를 끊기 위해 교회마다 장사진이 펼쳐졌습니다. 당시 다음과 같은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잔돈을 돈궤 속에 짤랑 넣자마자 영혼은 연옥을 빠져나오네." 루터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한 모든 신자들은 면죄 증서 없이도 벌과 죄를 완전히 사할 수 있으니라(95개 조 반박문 제35조)."

 

1517년에 95개 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대문에 붙인 루터는 원래 조용한 토론으로 교회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였습니다. 교회 대문은 게시판 같은 역할을 했으므로 루터는 교황청의 신학자나 관료를 상대로 사상 논쟁을 벌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루터의 지지자들과 동료들이 반박문을 대량으로 복사해 배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루터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고 종교개혁의 선봉에 서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인물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인쇄술의 위력을 깨달은 루터는 팸플릿을 만들어 민중을 선동하는 데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1520년에 찍은 팸플릿인 '도이칠란트 크리스트교 귀족에게 고함'에서 루터는 대중성을 염두에 두고 강렬한 구어체 도이칠란트어로 역설하였습니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한들 지금보다 나쁘겠습니까?" 초판 4천 부가 며칠 만에 매진되었습니다. 루터는 25년 동안 2주일에 한 번 꼴로 팸플릿을 찍었습니다.

 

 

루터의 업적

루터가 펼친 일들 중에서 덜 알려진 중요한 업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이칠란트어로 번역한 성서를 보급한 일입니다. 루터는 개인이 신앙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했습니다. 자신이 주도하여 신과 직접 대면하려면 무식한 백성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그 나라말 성서가 필요했습니다. 루터의 번역 작업은 현대 표준 독일어가 정착되는 데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이칠란트 민족주의와 민중의 지지, 여기에 교회가 차지한 광대한 토지를 돌려받거나 더 갖고 싶었던 귀족들의 경제적 이해관계까지 절묘하게 맞물려 루터의 종교개혁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습니다. 루터는 애초 순진무구하고 용감하게 교회 개혁을 주창했고,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의 열망을 영악하게 하나로 모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각광받는 새로운 미디어 기술의 위력을 현명하게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배경 및 결론

종교개혁의 원인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 종교개혁은 특정한 개인이나 계기가 그 원인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들이 맞물려서 일어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루터의 저작이 독일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가 아는 종교개혁은 독일 지역 수도사 사이의 논쟁으로 그쳤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기술적인 요인뿐 아니라 각종 사회적인 문제들이 얽혀있기에 종교개혁의 배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면죄부, 성유물 판매 등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에 대해 마르틴 루터가 비판한 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면죄부나 성유물 판매가 심각한 부패로 보이지만, 그 정도 부패는 이전 시대의 부패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패에 대한 비판이 곧장 교리의 개혁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직자들의 부패가 문제라면 부패한 성직자들의 행위를 비판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부패의 원인을 신학에서 찾았습니다. 루터에게 있어 교회의 부패는 잘못된 신학의 여러 결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종교개혁이 단순한 교회 정화운동을 넘어 사상사적 중요성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루터 개인의 업적뿐 아니라 시대적 배경 역시 종교개혁의 발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교회 개혁에 대한 요구는 루터 이전에도 있었고 심지어 이후에도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직전 시대에는 아비뇽 유수로 촉발된 교회의 분열 시기가 있었습니다. 95개 조 반박문이 등장하기 100여 년 전인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로 분열은 마감했지만 교황청은 잃어버린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아울러 분열의 통합 과정에서 교황 수위권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갔으며 이는 종교개혁가들이 교회의 전통이 갖는 신앙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습니다. 당대 사회도 종교개혁가들이 주창한 새로운 사상이 퍼지는 데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였는데, 당시 자유도시의 코뮌들은 권력의 중앙집권화에 맞서 지방의 권한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중세 이래로 도시 자치의 중심은 원래 주교였고, 주교는 사실 상의 도시 영주 내지 시장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도시별로 선출된 주교는 도시민들의 자치를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때문에 도시민들은 자신들의 자치를 지키기 위해서 교황의 간섭이 강할 때는 황제와 결탁하기도 했고, 반대로 황제의 간섭이 강할 때는 교황과 결탁하는 등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 알프스 이북 지역은 황제와 교황의 권력 다툼이 황제의 승리로 기울어져 황제권이 일방적으로 강화되었고, 주교들은 황제의 봉신으로써 황제 권력을 견제해줄 수 없는 존재들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독일의 도시들은 교황도 아닌 황제도 아닌 새로운 이념적 구심점이 필요해졌고, 이 상황에서 일어난 종교 쇄신 운동은 그들의 요구에 부합했습니다. 이러한 지방의 권력자들은 종교개혁 운동이 살아남는 정치적 안전장치를 제공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원인에 대한 이해는 수 백 년간 많은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으로 인해 많은 오해와 대립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나치게 단순화된 관점이나, 오류가 포함된 관점, 불공정하게 해석한 관점이 널리 퍼져있기에 오해를 피하는 것 역시 이해의 중요한 과정 중 하나입니다.

 

 

루터 '95개 조 반박문' 중 주요 논제

5조 - 교황은 교회법에 명시된 것 이외에는 형벌을 부과하지 못한다.

6조 - 교황은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할 뿐이지 인간의 죄를 사하지는 못한다.

21조 - 교황이 죄를 면하게 할 수 있고, 따라서 모든 형벌에서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다며 선전하는 설교자들은 모두 엉터리다.

30조 - 스스로 참회하는 일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는데 하물며 남의 죄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35조 - 면죄부를 얻어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는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40조 - 주어진 형벌을 달게 받는 일이 참다운 회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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