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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중세시대 중앙 집권 국가

by EDMBLACKBOX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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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지탱하던 봉건제의 세 가지 요소는 지방 분권(정치), 장원(경제), 기사제(군사)입니다. 13세기부터 이 세 요소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귀족이 차지했던 자리에 전문 행정 조직에서 배출한 관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정해진 영토 안에 비슷한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특성을 공유하는 '국민'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입니다.

 

 

비상시를 대비한 상비군의 등장

흑사병 때문에 농민 인구가 급감하자 영주가 농노에게 노동력 제공 대신 화폐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폐쇄적 장원제가 무너지면서 경제 시스템은 개방적 경제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 같은 장기간 원정길에 오른 기사들과 봉건 제후들이 자기 영지 관리에 소홀했던 것도 장원 시스템 붕괴의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14세기 중반에 화포가 보급되면서 갑옷으로 무장하고 말을 탄 채 성을 공격하거나 방어하던 기사전은 총과 대포로 무장한 보병들의 전투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써 정치, 경제, 군사 측면이 모두 근대적으로 변하면서 세상도 변하게 되었습니다.

 

 

구식 대포, 출처 : Michal Bystrek - ARTSTATION

대포의 유래

화약을 이용한 대포는 14세기 초인 1320년대에 아라비아에서 처음 발명되었습니다. 포신은 철판이나 철봉을 원통으로 말아서 만들거나, 나무로 만들어 철로 된 고리를 끼우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탄환은 돌이나 둥근 철환 등을 사용하였으므로 탄환 자체가 폭파되면서 파편이 튀지는 않았습니다. 포구에 화약을 놓고 장전하여 발사하였으나, 포신을 땅속에 반쯤 묻거나 벽돌로 포대를 쌓아서 사용했기 때문에, 초기의 대포는 기동성이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국민국가 탄생

십자군 원정이 끝나자 이번에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백년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양쪽의 군주에게 얽힌 기사 계급과 귀족들은 이 장기간의 전쟁통에 죽거나 재산을 탕진하면서 자멸하였고, 왕은 유일한 승리자로서 국민국가(Nation State)라는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왕은 국민이라는 낯선 개념을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작가들과 화가들은 민족 영웅들을 발굴해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아서왕 신화도 12세기에 이런 목적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인쇄술과 종이가 보급되면서 문자 통일과 표준 언어 도입이 용이해진 것도 국민국가 탄생에 한몫하였습니다.

 

1066년 노르망디의 공작 월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후 2세기 동안은 국왕이 정치 체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고쳐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존 왕이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서명한 '대헌장'은 역설적으로 평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의회 정치 초석이 되었습니다. 중세 연구자 스트레이어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대헌장은 왕이 자의적으로 정부를 만들지 못하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앙 집권 정부를 불가능하게 한 건 아니다."
대헌장 이후 오히려 중앙 집권화에 가속이 붙었습니다. 관료들은 효율적인 사법 행정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렸했고, 1274년 즉위한 에드워드 1세는 강력한 군주 국가의 위용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번영을 이끈 황제의 이름을 본뜬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백성들은 오로지 평화를 원하다.

프랑스에서는 조금 느리게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졌으나, 1300년 무렵에는 잉글랜드와 거의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백년전쟁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 왕조의 가문들이 대를 이어 싸운 전쟁입니다.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 백년전쟁을 기점으로 봉건제가 완전히 붕괴했고, 새로운 신분 계급이 출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구시대의 모든 것들이 쇠락하고 있을 때 홀로 강해진 것이 왕권입니다. 예를 들면, 백년전쟁 이전 프랑스의 왕은 여러 힘 있는 대영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으며 국가 역시 영주들의 느슨한 동맹체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백년전쟁이 끝나자 상비군을 갖춘 강력한 국왕이 탄생하였습니다. 백년전쟁 결과 프랑스 지역에 점유하고 있던 영토를 거의 다 빼앗긴 영구의 상실감은 대단했는데 이 상실감은 강력한 권력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부추겼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백년전쟁에서 돌아온 기사들이 대귀족의 권력 쟁탈전에 또다시 투입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붉은 장미 문양을 쓰는 랭커스터 가문과 흰 장미 문양을 쓰는 요크 가문이 30년(1455년~1485년)에 걸쳐 또 전쟁을 치렀습니다. 장미전쟁이라 불리는 귀족 가문들 간의 혈투는 귀족들의 공멸로 끝나게 됩니다. 이제 더 동원할 기사도 없고 서로 이권을 놓고 또는 명분을 놓고 싸울 만큼 거대한 귀족 가문도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헨리 7세가 절대왕권을 구축하게 된 배경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장미전쟁 삽화, 출처 : 위키백과

장미 전쟁이란?

장미 전쟁은 붉은 장미를 표시로 삼은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를 표시로 삼은 요크 왕가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며, 1455년부터 1485년까지 벌어졌습니다.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6세의 발병을 틈타 1453년 호민관 겸 방위관이 되어 랭커스터가의 중심세력인 서머셋 공작과 싸워, 장미전쟁을 일으켜 그를 멸하였습니다. 1460년에 리처드는 왕위를 요구하여 헨리 6세의 사후 왕위 계승이 승인되었으나, 랭커스터파의 반대로 리처드는 전사하였습니다.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는 1461년 랭커스터가를 격파하고 왕위를 획득하여 에드워드 4세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요크가 내부에 불화가 일어나, 1483년 에드워드 4세의 사후,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이 에드워드 4세의 적자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에드워드 4세의 동생 글로스터 공 리처드가 리처드 3세로서 즉위하였습니다. 이에 어머니 계통으로 왕실에 연결된 랭커스터가의 유일한 왕위 요구자인 헨리 튜더가 1485년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1485년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격파하고 헨리 7세로 즉위하였습니다. 이로써 장미 전쟁은 끝나고 튜더 왕조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의 과정에서 많은 제후와 기사가 몰락하고 튜더 왕조 헨리 7세에 의해 잉글랜드의 절대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장미전쟁의 구귀족 중에서도 왕권에 대하여 반항적인 부분이 거의 모두 괴멸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헨리 7세의 국가 재건사업을 용이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을 끝내줄 통치자

평범한 백성들은 끝도 없이 벌어지는 분쟁을 모두 끝내줄 수 있는 강력한 통치자를 열망하였고, 왕은 이에 부응했습니다. 지금이야 누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천년 전만 해도 국민국가란 사람들에게 무척 낯선 개념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제국 아니면 도시국가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국은 자칫 방만하게 운영되기 십상이었기에, 시민들은 제국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이 미약했습니다. 한편 도시국가는 효율적으로 운영되긴 했으나 시민들은 나라가 각종 이권에 따라 언제든 분열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갔습니다. 그 둘의 장단점을 보완한 새로운 통치 체제가 국민국가라는 가상 공동체입니다. 1300년경 유럽에 현대적인 국민국가의 모습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21세기에 200개 이상으로 늘어난 국민국가는 칠백 살 정도 나이를 먹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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