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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비잔틴 세계 - 유럽을 지키려는 몸부림

by EDMBLACKBOX 2021.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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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세계

현재의 그리스, 터키, 중동, 이집트 지역에 걸쳐 있던 동로마제국은 유럽의 수호자로서 동방 세력의 수많은 침입을 막아내면서 천 년 넘게 존속했습니다. 동로마가 그보다 일찍 무너졌다면 오늘날 유럽의 지형도와 문화는 무척 달라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로마'라든지 '비잔틴제국'이라는 표현은 모두 역사가들이 편의상 붙인 용어로,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제국을 그냥 '로마' 또는 '새로운 로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동로마제국 역사의 진실과 거짓
비잔틴제국의 수도인 비잔티움(이스탄불)은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였는데 그리스의 정복자 '비자스'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에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도시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었습니다. 비잔티움의 형용사형인 비잔틴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음모나 술수를 꾸미는 뜻이라고 나오는데, 세계인에게 이런 편견을 심은 사람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18세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번은 동로마제국의 역사를 "허약함으로 점철된 지루하고 단조로운 이야기"라고 간단히 평했습니다. 기번에게 '위대한 로마'는 대게 로마가 포함된 서로마만을 지칭합니다. 그렇지만 후대 유럽인의 입장에서 보면 동로마는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정신을 보존한 서구 문화 계승자이자, 슬라브족에게 보편 종교를 전파한 선도자이며,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이슬람 세력이 팽창하는 것을 막아준 평화 수호자이니 기번의 평가는 너무 가혹했습니다.

로마제국을 단절 없이 계승했기에 굳이 따지자면 동로마제국의 역사가 곧 로마제국의 역사이겠지만 서로마와 대립하는 관계로 살핀다면 330년 5월 콘스탄티누스의 천도 시기를 그 시작점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동로마는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 정복당하기까지 1123년 동안 존속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재위 기간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313년 밀라노 관용령을 발표하며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에게 자유를 부여했고 처음으로 정식 종교로 인정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치세 이래 동로마는 명실상부한 권력과 부와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용을 펼치면서도 죽음을 앞둘 때까지 세례 받는 것을 미루었습니다. 제국을 경영하고 통합하려면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편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현실적 목적을 중시했고, 그런 실용 정신이 동로마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의 역사가였던 에드워드 기번, 출처 : 위키백과

 

천년 동안 존속했던 비잔티움 제국에 대하여
476년 서로마를 정복한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황제 표장을 동로마 황제에게 바친 뒤 스스로 서로마 지역의 총독 자리를 맡았습니다. 이로써 로마제국의 정통성은 그대로 동로마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동로마가 장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효율적 관료제에서 나왔는데 이는 개인의 능력보다 시스템의 위력을 중시하는 로마제국의 오랜 전통을 계승한 것입니다. 특출한 소수가 국정 운영을 떠안기보다 보편적 능력을 갖춘 전문가 다수가 각자 분야에서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역사가 스티븐 런시먼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비잔틴제국의 힘과 안정은 관료제 덕분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 기간(527~565년)은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였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출신 성분이 아닌 능력에 따라 인재를 선발했습니다. 본인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유능한 장수들을 기용하여 과거 로마제국이 차지했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힘을 썼습니다. 이베리아 해안 지역을 점령하고 동 고트 왕국을 멸망시켰으며, 즉위 초기부터 대립하던 거대 세력 사산조 페르시아와 강화 조약을 맺음으로써 외부의 위협 요소를 제거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법대전'을 편찬하는 사업에 큰 공을 들였습니다. 향후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이 법률 체계를 모델로 삼게 됩니다.

유스티니아누스1세, 출처 : 위키백과

비잔틴 정신을 상징하는 예술품은 모자이크입니다. 서로 다른 개별 조각들을 절묘하게 짜 맞추어 거대한 단일 작품을 만드는 모자이크의 창작 원리는 비잔틴제국을 오래 존속시킨 제국의 통합 정신 같습니다.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공은 988년에 전통 전래 종교를 포기하고 동로마의 종교(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채택했습니다.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는 비잔틴 계승자라고 자처하며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 칭했습니다. '차르(tsar)'라는 로마식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동로마는 로마의 정치와 법을 계승했지만 언어와 사상은 그리스를 계승했습니다. 그리스와 동방 문화가 융합한 헬레니즘(Hellenism)은 실용 정신으로 가득 찼습니다. 보편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중심에 두고 황제 권력과 교회 권력이 조화를 이루었기에 통합 제국은 오래도록 존속했습니다. 비잔틴제국은 사라졌으나 유럽 문화 곳곳에 스며든 비잔틴이라는 형용사는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동로마에 관해 조금만 알아도 비잔틴이라는 형용사에 부여된 부정적 의미가 정보 부족에서 빚어진 편견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잔틴 모자이크 예술, 출처 : Aleteia

비잔틴 회화에 대하여
비잔틴 시대의 회화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모자이크가 대표적으로 유행했습니다. 모자이크는 작은 각 추대형으로 자른 색 대리석을 석회 벽 위에 줄 맞춰 끼워 넣어 회화나 도안을 그려내는 일종의 공예기술입니다. 이미 폼페이 등에서도 우수한 예를 볼 수 있으나 고전기 작품의 예가 주로 방치장의 장식인 데 대하여, 비잔틴의 그것은 궁정과 관계가 있는 사원에 장엄함을 주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잔틴의 것은 색 대리석뿐만 아니라 뒷면을 도금한 유리, 색유리, 도자기 등의 소재도, 전체적으로 다채롭고 광택이 나며 색의 대비 효과나 표현 효과 등 매우 화려하고 숭고함을 갖춘 것이었습니다. 비잔틴식의 장려한 모자이크 기법의 성립은 6세기 초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의 주요한 대사원은 대부분이 모자이크로 장식되고,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사원은 오래되고 총합적 완성미를 보여주는 좋은 예였으나, 15세기 터키인에게 점령당하여 회교사원으로 개축될 때 두꺼운 석회질 벽으로 고쳐지는 바람에, 오늘에 와서는 일부 모습밖에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비잔틴 모자이크의 모습을 간직한 가장 좋은 예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있는 아리우스 파 세례당의 '그리스도의 세례', '열두 사도', 성 비탈레 사원에 있는 '유스티니아누스와 그 종신들' 등은 모두 6~7세기의 작품들입니다. 이 작품들은 소재의 제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색의 선과 색면과의 대비, 금색의 바탕, 조형 등이 훌륭한 장식미를 낳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도상면에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성서의 도양이 표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헤브라이인은 설화성이나 서술적 창조성에 뛰어났지만 그들은 그것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천분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한편 라틴인의 자연주의적 사실, 소아시아인의 세련된 공예기술 특히 금이나 은과 같은 세공에 보이는 감각, 또는 소아시아를 넘어서 멀리 중앙아시아로부터 전래된 것이라고도 생각되는 선적·추상적 묘사가 비잔틴이란 지점에서 합류, 일체화되어, 기독교 미술은 이 시대에 비로소 풍부한 설화로서의 성전·성자의 도상화가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모자이크는 제작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프레스코에 의한 벽화가 보급되었습니다. 표현 방식은 모자이크와 마찬가지이며, 다분히 동방적으로 도식화된 것으로서 그 유례는 오늘의 유고슬라비아의 마케도니아 집아과 아드리아 해안에 잘 보존된 상태로 그 모습을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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