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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로마 멸망 이후

by EDMBLACKBOX 2021.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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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 : 로마 멸망 이후 바바리안이 건설한 시스템

무력이 판을 치던 시대에 힘없는 농민들은 생계 수단인 가축과 농작물을 약탈당할까 봐 항상 두려움을 달고 살았습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힘 있는 사람에게 양도하고 그 대가로 그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권리와 군사적 보호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봉건제의 시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농으로서 불안하게 토지를 소유하는 것보다 농노로서 안정적이고 위협 없이 토지를 소작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농민들은 판단한 것입니다.

* 봉건제는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아시아의 국가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제도였습니다.

안정을 추구했던 중세인들
농민이 영주에게 바치거나 영주가 왕에게 바친 토지를 '봉토'라고 부릅니다. 왕은 영주에게 이 토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이용 권한을 하사하고 영주는 다시 농민에게 하사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이 관계에서 신하 입장이 된 사람을 '봉신'이라고 부릅니다. 영주와 봉신 관계를 맺으면, 농민은 영주를 먹여 살리고 영주는 봉신인 농민을 보호할 의무가 생깁니다. 영주는 다시 왕과 똑같은 협약을 맺고 봉신이 되었습니다. 영주를 중심으로 자급자족하는 경제 단위를 '장원'이라고 부릅니다. 장원 안에서 의식주가 모두 해결되며 왕국의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습니다.

* 중세 봉건제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농노제'
농민이 땅의 주인인 영주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경작권을 부여받은 농민은 영주에게 세금과 노동력을 바치는 대신 영주에게 생명을 보호받습니다.

봉건제는 정치적으로는 영주들이 자기 지역을 독립적으로 통치하는 지방 분권을 의미합니다. 현재 시대와 같은 공권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보면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왕이 "크게 관여하지 않을 테니 지역별로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봉건제의 군사적 측면은 기사제입니다. 약탈을 막으려면 지역별로 군대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기사들입니다. 기사는 세습 귀족과 평민의 중간 정도 되는 계급으로서 자신은 상비군으로 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으면서 실제 전투가 버어질 때는 농민들을 군사로 차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기사가 곧 영주이기도 했습니다. 보통 기사도라 함은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봉신에게는 관대하게 대하는 기사의 덕목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주가 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면 왕은 일정 세금만 걷는 대신 영주의 독립 차지권을 보장해주며 봉토를 하사했습니다.

 

로마와 게르만, 서로 뒤바뀌다.
봉건제는 족장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족장은 부족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서 싸우는 게르만 부족의 습성이 있었습니다. 흉노는 서양 문헌에 '훈족'으로 기록되었는데 훈족 세력이 서쪽을 향해 팽창하자 게르만족은 훈족에 맞서다가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밀려가게 됩니다. 게르만족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로마와 충돌했습니다. 로마군에 제압된 게르만족은 노예로 편입되었고, 로마에 맞선 게르만 세력은 끊임없이 로마를 괴롭혔습니다. 서로마는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의 일격으로 게르만에게 정복되지만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황제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며 총독으로 머물렀습니다. 게르만족이 로마에 편입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문화가 사회 여러 면에 반영되어 정착된 것이 봉건제입니다. 게르만족은 로마제국 입장에서 무식하고 거칠고 유랑하는 야만족일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문명인인 로마인보다 미개한 족속들은 아니었다고 평가됩니다.

도이칠란트의 역사가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은 이렇게 말합니다. "게르만족이 로마에 동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로마인들이 게르만족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게르만족은 로마 문명의 파괴자가 아니라 새로운 문명의 조력자였습니다. 게르만족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를 단념한 로마 황제들은 이들이 로마 영토 안에 살 수 있도록 허가했고 자치권도 부여했습니다. 그러자 더 많은 게르만족이 이동하게 됩니다. 상하 위계 관계를 중요시하는 게르만의 습속이 곳곳에 스며든 것입니다.

유럽 인구는 1300년까지 꾸준히 증가하다가 1348년을 기점으로 흑사병과 대규모 전쟁 때문에 급속히 감소합니다. 흑사병 사망자가 특히 많았던 것은 영양실조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이 전염병에 아주 취약했기 때문입니다. 인구 감소는 봉건제 쇠퇴의 주요 원인입니다. 봉토를 경작할 농민들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세금도 줄어들다 보니 봉건적 경제 질서는 차츰 무너졌습니다.

봉건제가 무너진 자리를 대신한 것은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였습니다. 지방 귀족의 권한은 축소되고 권력은 왕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기사가 사라지고 중앙 정부에서 운영하는 상비군이 등장했습니다. 폐쇄적이며 자급자적이었던 장원제의 경제 활동은 개방형 시장 경제로 전환되었습니다. 봉건제는 중앙 집권 국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불안한 세상을 지탱하는 임시 정치 체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봉건제에서 영주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했던 농민들은 더 큰 거대 영주인 왕과 관계를 새로 맞는 것에 별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통치 방식이든 착취 방법이든 거의 다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게르만족의 대이동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서기 375년(빠르면 300년 정도)부터 568년까지 지속된 시기이며, 서로마 제국의 쇠퇴 진행 및 멸망한 이후 시기에, 주로 게르만족 및 훈족 등 여러 민족들이 로마의 영토에 해당하는 유럽 지역으로 침입한 때입니다. 영어권에서는 민족 대이동기라고 하며 로마 및 그리스의 관점에서는 야만인의 침입기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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