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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안데스 문명 : 잉카에 대하여

by EDMBLACKBOX 2021.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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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문명

잉카는 고대 문명이 아니라 1400년대부터 1500년대까지 짧게 존속한 제국 이름입니다. 안데스 문명의 일부인 잉카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잉카가 아닌 티완틴수요라고 불렀습니다. 잉카 제국은 에스파냐인들이 붙인 명칭으로, 잉카는 원래 통치자의 고유한 이름이었습니다.

잉카 제국
타완틴수유(Tawantinsuyu)는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입니다. 제국의 군주 칭호는 사파 잉카라 했으며, 이 군주 칭호를 따서 서양에서는 잉카 제국(Inka Empire)이라 일컬었습니다. 잉카 제국의 행정, 정치, 군사의 중심은 지금의 페루인 쿠스코입니다. 이 제국은 13세기 초 페루의 한 고원에서 기원했으며, 1438년에 본격적으로 역사시대를 맞이합니다. 1438년부터 1533년까지 약 95년 동안 잉카는 무력 정복과 평화 조약을 적절히 사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페루, 남서 중앙 볼리비아, 북서 아르헨티나, 북 칠레, 그리고 콜롬비아 남부 등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넓게 퍼진 방대한 남서 아메리카 대륙을 융합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자치 정부 연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는 제국
'손자병법'에서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전술이라고 규정하는데, 잉카 통치자들 또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잉카제국은 공격보다는 '화의'를 우선으로 하는 대외 전략을 구사했으며 전쟁은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잉카를 정복한 것은 대포와 기마병으로 무장한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소규모 부대였는데, 이 작은 군대가 거대한 잉카제국의 군대를 무찔렀다는 것이 언뜻 의아하지만, 싸우기에 앞서 화의를 먼저 제안하는 전통이라든지, 피사로가 오기 전에 이미 분열돼 있던 잉카의 상황이라든지, 피사로가 첫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간 후 천연두가 크게 유행한 사실 등을 종합해 보면 피사로 군대는 이미 잉카의 대군을 아주 손쉽게 제압하는 천재일우를 얻은 셈입니다.

잉카는 성립부터 멸망까지 일관되게 포용성과 개방성을 중시했기에 다른 부족을 정복한 이후에는 철저히 유화책을 썼습니다. 각 지역의 실질 통치는 토착민에게 맡겼기 때문에 잉카는 제국이라기보다 자치 정부의 연합에 가까웠습니다. 중앙 정부는 외교와 교육, 군사에 관여했지만 나머지는 지방 정부에 맡겼습니다. 공용어 정책을 널리 펼쳤으나, 문화적 차이는 물론 존중했습니다.

타완틴수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연합 개념
타완틴수유는 네 개의 지역 혹은 '네 개의 지방 연합'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 그대로 잉카 제국은 네 개 수유로 나뉘어 있으며, 수유의 네 모서리는 수도인 쿠스코와 접해 있습니다.

잉카제국의 경제
공동 생산과 공동 소유를 상징과 비유로 제시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이상적 사회 주의론의 원조격으로 자주 거론됩니다. 사회주의의 경제적 측면인 공산주의의 핵심은 '공동 소유 지향'에 있다기보다는 '사적 소유 철폐'에 있습니다. 사적 소유를 없애려면 공정한 경쟁을 깨뜨리는 소유 대물림을 강력하게 통제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단지 부모가 부유하거나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후손이 불공정한 조건에서 삶을 시작하게끔 만듭니다.

잉카의 법률은 부모의 빚이 아무리 많더라도 부모가 죽은 다음 자식이 그 빚을 대신 갚아야 하는 불행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평등을 지향한 복지 제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의 복지 국가 모델을 실현한 고대 국가를 뽑으라면 잉카가 가장 먼저 거론되어야 할 수준입니다. 잉카는 4만 킬로미터가 넘는 도로망과 치밀한 행정 조직을 갖춘 제국이었습니다. 아이유(Ayllu)라는 경제 단위를 중심으로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물물 교환만 이루어지는 폐쇄 경제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잉여 생산물은 국가에 귀속되었기에 시장 경제가 발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평등을 지향한 잉카제국에서는 평등을 위협하는 도둑질과 거짓말, 게으름이 특히 죄악시되었습니다. 노동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빠짐없이 일터에 나가 각자 능력에 맞는 일을 할당하며 노동을 했습니다. 혼인 후 1년 동안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고 쌍둥이를 낳으면 면세 혜택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전설, 마추픽추
잉카의 수도 쿠스코는 완전히 파괴되어 옛 모습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높은 산 위에 건설된 마추픽추는 침략을 피해 온전히 보존되었습니다.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통 접하는 마추픽추 유적의 우뚝 솟은 봉우리는 '젊은 봉우리'란 뜻을 지닌 '와이나 픽추'입니다. 1943년 네루다는 멕시코 총영사에서 해임된 후 칠레로 돌아오는 길에 페루 마추픽추 유적을 찾았습니다. 폐허만 남은 그곳에서 역사의 주역이던 잉카인들을 떠올리며 시를 구상했습니다. 12부로 구성된 연작시 <마추픽추 정상에서>를 완성하고 나서 네루다는 이렇게 소회를 적었습니다.
"마추픽추를 보며 깨달았다. 나는 칠레인이자 페루인이자 아메리카인이다."

2000년 10월 APEC 정상 회담에 참석한 페루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자신의 부정이 탄로 나자 일본을 방문한 직후 페루 의회에 사직서를 팩스로 전송한 뒤 귀국하지 않았습니다. 무책임한 대통령이 남긴 책임 막중한 자리에 앉힐 인물을 뽑기 위해 페루 국민은 매우 심사숙고했습니다. 그리고 원주민 출신 톨레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잉카 멸망 후 500년 만에야 잉카 출신이 최고 통치자가 된 것입니다. 2001년 7월 28일 취임한 톨레도 대통령은 상징적인 의식을 치렀습니다. 바로 마추픽추에서 옛 잉카 방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한 사건입니다. 작가 바르가스 요사가 '원시와 문명이 공존하는 고난의 땅'이라고 부른 조국 페루의 국가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자유인이다."
500년 넘게 자유를 억압받으며 살아온 잉카의 후예 페루인들은 평등을 지향했던 복지 제국 잉카가 얼마나 자유로운 세상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페루 애국가 1절
Largo tiempo el peruano oprimido
la ominosa cadena arrastró;
condenado a una cruel servidumbre
largo tiempo , largo tiempo
largo tiempo en silencio gimió.
Mas apenas el grito sagrado
¡Libertad! en sus costas se oyó,
la indolencia de esclavo sacude,
la humillada , la humillada
la humillada cerviz levantó
la humillada cerviz levantó
cerviz levantó!.
Co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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