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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로마의 중요 전쟁 역사 간단 요약

by EDMBLACKBOX 2021.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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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100년 이상을 끌던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무찌르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로마는 대외적으로 강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그 점이 오히려 로마를 병들게 했습니다. 기원전 1세기의 역사가인 살루스티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를 거치며 코린트와 카르타고 같은 주변 강대국들은 모두 제압했기에 로마는 오히려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로마가 내부 갈등에 빠져 있을 때 외부에서는 반 로마 세력이 결집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비해 차별을 받던 8개 도시국가들이 독자 국가를 수립한다는 목표 아래 연합해 기원전 91년에 이른바 '동맹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합을 '이탈리아'라고 불렀습니다. 전반에는 동맹시들이 우세를 보였지만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3년 만에 끝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로마는 단순한 도시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통합 국가 형태를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스파르타쿠스

포에니 전쟁이란?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 사이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세 차례에 걸쳐 120년간 벌였던 전쟁입니다. 포에니(Poeni)라는 말은 라틴어 Poenicus에서 나왔는데, 이는 '페니키아인의'라는 뜻으로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B.C. 264~241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은 B.C. 219~201년, 그리고 제3차 포에니 전쟁은 B.C. 146년
결국 카르타고의 멸망으로 끝이 납니다.

 

이탈리아와 로마의 갈등
당시 로마에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핍박받던 이 노예들이 기원전 73년에 귀족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노예들의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중부의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한 노예 출신 검투사 80여 명은 베수비우스 산에 은신처를 마련했습니다. 스파르타쿠스는 오합지졸 병사들을 강력한 군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로마 지도부는 초기 진압 작전에서 연이어 실패했습니다. 기원전 71년 치열한 접전을 벌인 뒤에야 반란군은 진압되었습니다.

당시 진압군을 이끌던 크리수스의 개선 행사는 아주 작은 규모로 진행되었습니다. 대대적인 개선 행사를 마련하는 건 노예들의 위력을 반증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포로 6천 명에 대한 처형은 잔인하게 집행되었습니다. 노예들의 분노를 대변한 스파르타쿠스의 투쟁은 후대 로마 역사가들에 의해 평가절하 되었으나, 민중의 입과 입으로 전해지면서 핍박당하며 살아가야 했던 이들에게 자유를 쟁취하려는 의지를 끊임없이 불어넣는 신화가 되었습니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역사상 유일하게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기원전 59년 집정관에 선출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을 떠났습니다. 카이사르는 10년도 안 걸리는 짧은 시간에 8백 개 도시와 3백 개 부족을 평정하면서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 일대를 가리키는 지역인 갈리아를 정복했습니다. 카이사르가 크게 세력을 확장하자 위협을 느낀 원로원은 다른 집정관인 폼페이우스와 협력하여 카이사르를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림길에 섰습니다. '이대로 앉아서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고 말 것인가, 아니면 결단을 내릴 것인가?'

기원전 49년 1월 11일 새벽 본국이 먼발치로 보이는 루비콘 강어귀에 도달한 카이사르는 잠시 고민하다가 루비콘을 건너기로 결정했습니다. 로마군이 로마를 향해 진격했지만, 폼페이우스가 수세적인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대규모 군사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계속 지구전으로 맞섰습니다. 원로원 보수파 세력은 폼페이우스에게 전면전을 벌여 내전을 조기에 진압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드디어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한판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전투에서 패배한 뒤 겨우 목숨을 부지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났으나 암살되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조각상

공화정에서 제정의 시대로

카이사르는 승리는 공화정의 몰락을 의미했습니다. 공화정 시대를 살아온 로마인들 대다수는 카이사르가 왕에 오르고 황제가 된다는 소문에 극도로 혐오감을 표시했습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주도한 공화정 회복 세력은 카이사르 암살 계획을 공모했습니다. 이 작전은 카이사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카이사르가 앞으로 저지를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착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죽인 폼페이우스의 동상 바로 앞에 피투성이로 쓰러졌습니다. 카이사르가 이전에 점찍어 둔 후계자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였습니다. 삼촌의 사망 소식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암살 주도 세력인 공화파와 맞서기 위해 안토니우스 등과 힘을 합쳤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암살을 주도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세력을 진압했지만 이제는 로마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동맹자인 안토니우스와 마지막 결전을 치러야 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동맹을 맺고 동부 지중해 세력을 모았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와 에스파냐 등 서방 세력을 결집시켰습니다. 동서 대결 양상을 보인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에서 서방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결했고, 내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100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한 로마는 이제 '팍스 로마나(Pax Romana - 로마에 의한 평화)'라는 번영 시기에 들어갔습니다.

악티움 해전 바로크 그림화

악티움 해전이란?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의 내전 기간에 일어난 해전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연합 함대와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교전한 해전입니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리스의 악티움 곶 인근 이오니아 해에서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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