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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로마 종교 역사(Feat. 아비뇽 유수, 카노사의 굴욕)

by EDMBLACKBOX 202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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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역사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포용한 까닭은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 통합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시대의 왕과 황제들이 그리스도교와 협력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세속 권력과 보편 종교를 지향하는 로마 교회는 상호 협조했으나, 교회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둘 간의 제휴 관계에는 결국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391년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로마 교회는 불과 두 세기도 지나지 않아 결정적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으로 분할 통치되던 로마의 서쪽에는 게르만족의 영향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476년 게르만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의 침략으로 서로마제국은 패망했습니다. 동방 교회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로마 교회는 서로마 붕괴 이후 더욱 위축되었고, 결국 게르만족의 힘을 빌려 동로마를 견제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리인 삼위일체, 출처 : Wikipedia

로마 교회의 힘겨운 선택
교회가 동과 서로 분열된 발단은 우상 숭배 논쟁과 삼위일체 논쟁입니다. 초기에 예수의 십자가 이외에는 어떤 성상도 허락하지 않았던 서로마는 교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 상황에서 게르만 세력을 포섭하려고 그들의 종교 풍습인 우상 숭배를 받아들였습니다. 동방 교회는 이를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삼위일체는 좀 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신성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아들 예수는 단지 전달자라고 주장하는 동방 교회와 아버지와 아들 모두 동등한 신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서방 교회, 즉 로마 교회의 입장 차이는 4세기부터 불거진 이래 결국 완전한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가 496년 로마 가톨릭으로 종교를 전향한 사건은 서로마 교회에게는 무척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계기로 동로마 교회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국가는 다시 손을 잡았습니다. 800년 크리스마스에 교황은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를 서로마의 전통을 계승하는 황제로 추대하고 황제관을 씌워주었습니다. 샤를마뉴는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으며 교황과 황제의 전략적 제휴는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습니다. 교황 요하네스 12세는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아주고 귀족 세력의 압력에서 보호해 준 동프랑크의 왕 오토 1세를 96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교황은 신성 로마가 패망한 서로마의 부활이기를 기대했지만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황제의 발언권이 점점 거세졌기 때문입니다.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 1세, 출처 : Wikipedia

 

고위 성직자 임명권이 갈등의 원인이 되다.
1073년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가 관여하던 성직자 임명 권한을 완전히 독점하고자 했습니다. '세속 권력이 성직을 임명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게 그 명분이었습니다.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교황과 황제의 밀월 관계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위축된 황제권을 압도하며 교황 권력의 승리를 보여준 사건이 '카노사 굴욕(1077년)' 사건입니다. 밀라노 주교 선출을 놓고 그레고리우스 7세와 권력 쟁탈전을 펼친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종교적 파면에 해당하는 파문 조치를 당한 뒤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카노사에서 이룬 교황의 상징적 승리는 1122년 도이칠란트 남부의 작은 도시 보름스에서 실질적 승리로 확정되었습니다.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카리베르투스 2세 사이에 체결된 협약은 성직자 임명권을 교황이 갖되 후보가 다수일 때는 황제가 선택권을 갖기로 합의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교황권의 독립과 교황의 승리가 온 세계에 공표되었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재위 기간(1198~1216년)에 교황의 권력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 역사적 의미
이 사건으로 세속의 권력에 대해 교황 권력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카노사'라는 이름은 세속적 권력의 기독교에 대한 굴복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 로마 가톨릭 교회 세력에 대항해 이른바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일 때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라고 연설했는데, 이 말은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빗대어 말한 것이었습니다. 즉, 독일은 로마 교황청 등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문화적 또는 종교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이라는 타고난 운명이었습니다.
한편 일부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북이탈리아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으로 보고있습니다. 교황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가 독일을 몰아내기 시작한 실마리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카노사(Canossa)라는 말은 독일, 스웨덴, 이탈리아 등에서 하기 싫지만 억지로 굴복해야 하는 상황일때 굴복, 복종, 항복의 의미로 사용합니다.

카노사의 굴욕 사건, 출처 : Wikipedia

1301년에 서임권을 놓고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가 맞붙었습니다. 이번에는 교황의 완패로 끝났습니다. 필리프 4세는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버렸습니다. 다시 로마로 이전하기까지 70년에 걸쳐 교황청이 아비뇽에 갇혀 있던 이 시기(1309~1377년)를 '아비뇽 유수'라고 부릅니다. 카노사 성에서 벌어진 것과 정반대 상황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비뇽 유수기의 교황들
- 클레멘스 5세(Clemens PP. V - 1305년~1314년)
- 요한 22세(Lonnes PP. XXII - 1316년~1334년)
- 베네딕토 12세(Benedictus PP. XII - 1334년~1342년)
- 클레멘스 6세(Clemens PP. VI - 1342년~1352년)
- 인노첸시오 6세(Innocentius PP. VI - 1352년~1362년)
- 우르바노 5세(Urbanus PP. V - 1362년~1370년)
- 그레고리오 11세(Gregorius PP. XI - 1370년~1378년)

프랑스 아비뇽의 교황궁, 출처 : Wikipedia

그레고리우스 11세 때 교황청은 로마로 복귀했으나 이미 교회는 로마 파와 아비뇽 파로 완전히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1378년부터 1417년에 이르는 대분열 시기 중에는 로마 파 교황과 아비뇽 파 교황, 그리고 피사 파 교황 등 세 명이 동시에 자신이 진짜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분열과 로마 가톨릭의 권위 실추는 공교롭게도 중앙 집권 국가의 도래에 기여했습니다. 종교 개혁의 불길이 일어나고 신교 세력이 등장하자 교황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식민주의와 다시 손을 잡고 아메리카라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습니다. 아메리카에 상륙한 콜론 원정대가 가장 먼저 치른 의식은 십자가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장려 정책을 폈던 황제들이 그러했듯 원정대에게도 그것이 긴요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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