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세계사

십자군 전쟁 : 천년전쟁에 대해 알아보자

by EDMBLACKBOX 2021. 5. 20.
반응형

십자군 전쟁(Crusades) 묘사, 출처 : Said Tahsine

십자군 전쟁 간단 요약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간헐적으로 일어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전쟁입니다.

 

 

같은 신을 섬기고 같은 성지를 공유했던 두 종교의 갈등
십자군 원정의 1차 목표는 예루살렘 수복이었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성지 순례를 다녀오면 죄를 일부 씻어낼 수 있다고 믿었기에 길고 험한 고행 길을 선뜻 자처했습니다. 순례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예루살렘이었지만 그 길목의 주인은 638년 이래로 이슬람 사람들이었습니다. 11세기 후반에 셀주크 제국이 세력을 넓히면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일대를 점령했습니다. 투르크인들은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순례에 오른 그리스도교도에게 통행료를 받았습니다. 신성한 행위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태도에 유럽인들의 심기는 불편해져 갔습니다.

 

교황은 십자군을 다음과 같이 독려했습니다. "내 명령을 따르는 것은 주님의 명을 받드는 것이오니 나를 따르면 너희의 모든 벌과 죄를 사면해 주리라." 면벌부 또는 면죄부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 바로 이때였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모욕을 존경으로 갚으라던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십자군은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상스럽고 끔찍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십자군은 이슬람 사람들을 산 채로 태워 죽이고 닥치는 대로 찔러 죽였으며 갓 태어난 아기들을 벽에 던져 죽여 버렸습니다. 한 십자군은 고향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솔로몬 궁의 회랑과 성전에서 우리 군대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말의 무릎까지 사라센 사람들의 피로 젖었다." 이 무차별 살해 작전은 1097년 니케아 점령, 1098년 안티오키아 점령, 그리고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 점령으로 완수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십자군이 점령한 지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1187년에 이슬람 세력에게 다시 넘어갔습니다. 1198년 교황에 즉위한 로마 주교 인노켄티우스 3세가 십자군 원정을 재개했습니다. 이 원정에서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도 수치스러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비록 불편한 관계에 있긴 했지만 형제나 다름없는 동로마의 심장을 피로 물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십자군이 1203년 7월 5일에 그리스도교가 처음 공인되었던 성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습니다. 무자비한 약탈과 방화, 강간이 벌어졌습니다. 동방 교회의 한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어깨에 십자가를 걸고 있던 그들을 보니 예전에 우리를 지배한 이슬람교도들이 무척 자비로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가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로 영원히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원래 같은 하나님을 믿는 동방 교회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시작한 그리스도교의 성전인데 바로 그들을 점령하고 약탈하는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그 뒤 십자군 전쟁은 독실한 신앙심을 지닌 프랑스의 루이 9세 같은 군주가 주도한 7차 원정까지 이어졌지만 결국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 원인

십자군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이슬람권의 결집입니다. 초창기 십자군의 연전연승은 당시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걸출한 지도자였던 살라흐 엣 딘(통칭 : 살라딘)이 등장하여 이슬람권은 세력을 결집하여 십자군에 반격을 하여 그들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가져온 것입니다. 당시 살라딘은 예루살렘 점령 시 피정복민들에게 관용을 보였고, 이는 이슬람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적인 소년 십자군이 유럽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자 이들을 해방시켰습니다.

 

두 번째는 십자군의 잦은 와해와 그로 인해 야기된 내부 분쟁입니다. 십자군은 상호 간, 또는 내부에서 국가 간 대립 및 영토와 경제적 이익 등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 국가인 헝가리의 자라시를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점령한 적도 있습니다. 또한 무지와 광신,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의 잦은 횡포는 당시 성지의 백성들과 같은 기독교권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신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처음과는 달리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끝에는 초라하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동로마제국에서 십자군들이 벌인 동방 정교회 교인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 그리고 정교회 성당인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무례함은 비잔티움 제국의 국교인 동방정교회와 십자군 기사들의 종교인 로마 가톨릭 간의 대립이 더 심하게 고착되어, 1054년에 있었던 교회 역사 최초의 분열 사건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분열이 고착화되게 하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두오모 성당, 출처 IDC

십자군 전쟁 영향

비록 십자군은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의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습니다. 초기에는 아말피, 베네치아, 바리만이 동방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후에 피사, 제노바 같은 다른 도시들도 지중해 무역 활동에 함께 동참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기 및 식료품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안티오키아, 베이루트, 트리폴리, 예루살렘, 키프로스, 알레포,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 위치한 주요 무역 거점들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 확장을 위한 전위로서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공급하였습니다. 이들이 획득한 부는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여 상업과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21세기에도 진행되는 십자군 전쟁?
로마 교회는 종교개혁이라는 새로운 요구에 직면했지만 스스로 개혁하지도 않았고 개혁 세력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가톨릭 군대는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신교도 1만 명을 죽였습니다. '위그노 대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가톨릭 세계는 1618년부터 30년간 개신교 세력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우르바누스 2세가 촉발한 십자군 운동은 대항해시대를 맞아 식민주의로 모습을 바꾸어 지속되었습니다. 신대륙 원정대는 겉모습을 바꾼 십자군이었습니다. 원정대는 신대륙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할 때마다 먼저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를 지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미국 행정부의 대외 정책 수립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 집단인 네오콘(Neocon - 신보수주의자)이 주도했습니다. 네오콘 가운데 일부 이론가들은 실제로 "유대-그리스도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대결"이라고 규정하며 이라크 전쟁을 20세기판 십자군 전쟁으로 몰고 갔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백 년 동안 십자군과 싸웠고 나중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와 싸워야 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이제 미국과 맞서 싸워야 하고,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의 공격과 탄압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