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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138

조선의 건국 년도와 조선 통치체제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공민왕의 개혁 실패 후 고려 사회의 모순은 심화되었고, 대외적으로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노략질도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홍건적과 왜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 등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1387년 명이 철령위 사건을 일으키자 최영은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고, 이성계가 4 불가론을 들어 반대하였지만 결국 요동 정벌이 단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벌 과정에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1388년). 그 후 이성계와 결탁한 신진 사대부는 고려 사회의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 개혁파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혁파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이색, 정몽주 등 대다수 온건 개혁파는 고려.. 2021. 9. 4.
국보 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특징 종목 높이 크기 국보 6호 충주 탑평리 칠층 석탑 충주 탑평리 칠층 석탑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위치는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에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건축되었습니다.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입니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습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추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 2021. 9. 2.
예술의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는 십자군 원정의 운송권을 맡은 도시이고, 피렌체는 교회의 자금을 관리하던 도시입니다. 이 두 도시의 경제적 풍요가 르네상스의 도래를 앞당겼습니다. 역사가 부르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인류사에 커다란 의미를 주는 두 도시가 있다. 300년 동안 격동에 휘말렸던 피렌체, 그리고 외면적으로 볼 때는 정치적으로 정체한 듯 보이는 도시 베네치아가 그곳이다. 우리는 두 도시가 보여준 것보다 더 선명한 대립을 생각할 수 없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누구인가?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1389년 9월 27일 - 1464년 8월 1일)는 이탈리아인 은행가, 정치인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사실상의 피렌체 통치자로 군림했던 메디치 정치 세력의 창시자입니다. 코시모의 권력.. 2021. 8. 5.
고려의 문화에 대해 알아보자 성리학의 수용과 유학의 발달 고려 시대에는 유교적 정치 이념이 강조되어 유학 교육이 확대되고 유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습니다. 고려 초기 광종은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적 소양을 지닌 신진 관료들을 등용하였고, 성종은 고려 초기 대표적 유학자인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수용하고 유교적 정치 이념을 내세웠으며 중앙에 국자감, 지방에 향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국자감은 유학부와 기술학부를 두어 관료와 기술 인력을 양성하였습니다. 고려 중기에는 문벌 귀족 사회가 안정되면서 유학도 점차 보수화되었습니다. 해동공자로 칭송받은 최충은 9재 학당(문헌 공도)을 설립하여 제자 양성에 힘썼고, 이를 계기로 사학 12도가 성립하여 사학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사학의 융성으로 관학인 국자감이 쇠퇴하자 관학 진흥책으로.. 2021. 8. 4.
우리나라 국보 5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정보와 위치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이란?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경내에 있는 석등입니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이 석등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쌍사자가 마주 보고 서서 앞발로 중대를 받들고 뒷발 밑에 연화좌가 있습니다. 중대의 둘레에 이중으로 연판을 새겼고 화대를 팔각으로 하여 위에는 개석을 덮었으며 그 위에 보주(寶珠)가 있습니다. 경남 합천의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 국립 광주박물관 소장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과 함께 신라시대의 3대 석등으로 일컬어지며, 높이는 약 3.3m입니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역사와 특징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 2021. 8. 3.
고려의 경제와 사회 알아보기 전시과 제도의 시행 태조 왕건은 공신들에게 역분전을 지급하였고, 경종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전시과 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시정 전시과, 976년). 전시과는 관리에게 전지와 시지의 수조권을 지급한 것으로 목종(개정 전시과, 998년), 문종(경정 전시과, 1076) 시기에 개정되었습니다. 경종 때 실시된 시정 전시과는 직관과 산관을 대상으로 관품과 인품을 18등급으로 나누어 지급하였습니다. 목종 때 실시된 개정 전시과는 직·산관에게 관품만을 기준으로 지급하였고, 문종 때 실시된 경정 전시과는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직관에게만 지급하였으며 지급하는 토지의 결수를 줄였습니다. 전시과에 따라 지급받은 토지는 소유권이 아닌 수조권만을 지급한 것으로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국가에 반환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 2021. 7. 12.
국보 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에 대해 알아보자 여주 고달사지 승탑이란? 여주 고달사지 승탑은 경기도 여주시 고달사 터에 있는, 고려시대 초기의 화강석제 부도입니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높이는 3.4m이며, 8각 원당형(圓堂形) 부도 중에서 매우 뛰어난 거작입니다. 조형 양식이 신라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적인 면에서는 고려시대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신라 말의 고승 원감 대사의 묘탑이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절터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의 묘탑인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보다는 앞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여주 고달사지 승탑 세부사항 높이는 3.4m이며 국보 제4호입니다. 기단부·탑신부·옥개석 등을 모두 갖춘 전형적인 팔각 원당형 승탑이나 상륜부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기단은 수.. 2021. 7. 10.
루터 종교개혁과 인쇄술의 발달 마틴 루터에 대하여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 ~ 1546년 2월 18일)는 독일의 종교개혁가입니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으며, 훗날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고 비판했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당시 면죄부를 대량 판매하던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자 요한 테첼에 맞섰습니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오.. 2021. 6. 21.
고려의 대외관계 후기사회 송나라, 거란, 여진과의 대외 관계 고려는 송과는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발해 멸망 등을 이유로 북방의 거란(요)은 배척하였습니다. 이에 거란은 1차로 소손녕을 보내 고려를 침략(993년)하였는데, 서희가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을 통하여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하여 고려의 영토에 편입시켰습니다. 이후 거란은 강조 정변을 구시로 2차 침입을 하였으나 양규, 김숙흥의 활약으로 격퇴하였고, 3차 침입 때에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서 소배압의 거란군에게 대승을 거두는데 이것이 바로 귀주 대첩(1019년)입니다. * 강동 6주 : 강동 육주는 993년(고려 성종 12년) 요나라(거란)의 제1차 침입 때 서희가 요나라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영유권을 인정받은 고려 서북면의 영토입니다. 당시 담판에서는 ".. 2021. 6. 21.
국보 3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에 대하여 신라 제24대 국왕인 진흥왕(재위 540~576)이 북한산에 세운 비로써, 국보 3호입니다. 이 비의 성격은 첫머리에 '순수(巡狩)'라는 표현이 있어,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순수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비봉(碑峰)에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고대관 신라실에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진흥왕 순수비의 역사 학자에 따라 신라 진흥왕 16년(555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는 반면, 비에 남천주란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568년 이후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비신 높이가 1.54m, 너비가 0.69m, 두께가 0.16m입니다. 진흥왕이 새로 공략한 국.. 2021. 6. 19.
중세시대 중앙 집권 국가 중세를 지탱하던 봉건제의 세 가지 요소는 지방 분권(정치), 장원(경제), 기사제(군사)입니다. 13세기부터 이 세 요소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귀족이 차지했던 자리에 전문 행정 조직에서 배출한 관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정해진 영토 안에 비슷한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특성을 공유하는 '국민'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입니다. 비상시를 대비한 상비군의 등장 흑사병 때문에 농민 인구가 급감하자 영주가 농노에게 노동력 제공 대신 화폐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폐쇄적 장원제가 무너지면서 경제 시스템은 개방적 경제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 같은 장기간 원정길에 오른 기사들과 봉건 제후들이 자기 영지 관리에 소홀했던 것도 장원 시스템 붕괴의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14세기 중반에 화포가 보급되.. 2021. 5. 31.
고려 문벌귀족과 무신정권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성종 이후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며 지방 호족 출신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들 중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역임한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고 합니다. 문벌 귀족은 과거제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 등을 통하여 경제 기반을 확보하며, 왕실 및 다른 귀족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강화하였습니다. 비틀거리는 문벌 귀족 사회 일부 문벌 귀족 가문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권력을 둘러싼 문벌 귀족 간의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유력한 문벌 귀족인 경원 이 씨 가문의 이자겸은 왕실과의 중첩된 혼인을 통하여 금의 사대 요구를 수용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에 인정오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 2021. 5. 31.
대한민국 국보 2호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란?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 공원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탑으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2호입니다. 석탑은 1467년(세조 13년)에 세워졌으며 3층의 기단과 10층의 탑신으로 되어 있고, 인물과 화초 무늬 따위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맨 위 3층은 오랫동안 무너져 내려져 있던 것을 1947년에 원상태로 복구하였습니다. 부식 이유는 새똥이라는데 웃지 못할 사항인 것 같습니다. 2000년에는 표면 훼손이 심각하여 유리 보호각을 씌워 놓은 상태입니다.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습니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 2021. 5. 31.
십자군 전쟁 : 천년전쟁에 대해 알아보자 십자군 전쟁 간단 요약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간헐적으로 일어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전쟁입니다. 같은 신을 섬기고 같은 성지를 공유했던 두 종교의 갈등 십자군 원정의 1차 목표는 예루살렘 수복이었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성지 순례를 다녀오면 죄를 일부 씻어낼 수 있다고 믿었기에 길고 험한 고행 길을 선뜻 자처했습니다. 순례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예루살렘이었지만 그 길목의 주인은 638년 이래로 이슬람 사람들이었습니다. 11세기 후반에 셀주크 제국이 세력을 넓히면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일대를 점령했습니다. 투르크인들은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순례에 오른 그리스도교도에게 통행료를 받았습니다. 신성한 행위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태도에 유럽인들의.. 2021. 5. 20.
고려 건국 과정 귀족 사회의 발전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의 통일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한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며 고구려를 건국하고(918년), 연호를 '천수'라 하고 송악(개경)을 도읍으로 삼았습니다. 왕건은 호족 세력을 통합하며 후백제와 경쟁하였고, 고창(안동) 전투에서 후백제에 승리하여 우세한 위치를 확보하였습니다. 한편,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되었습니다. 이후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하였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도 후백제의 거듭된 침략 등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려에 항복하였습니다(935년). 이후 고려는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일리천 전투에서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936년). 한편 발해가 거란에 멸망(926년)한.. 2021.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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