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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138

조선 전기의 문화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을까? 15세기를 주도하던 관학파는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해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여 훈민정음의 창제(1443년)를 통해 민족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관학파는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이라도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여 자주적인 민족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교육 기관으로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을 서울에 두었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 중앙에 4 학과 지방에 향교를 설치하였습니다. 그 외 서원과 초등 교육을 담당한 서당이 있었습니다.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소과 합격생인 생원과 진사로 제한되었습니다. 지방의 향교는 부·목·군·현에 하나씩 설립하여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담당하게 하였고 중앙에서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여 교육을 담당하게.. 2022. 3. 21.
[우리나라 국보 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고귀한 석탑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 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낮은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합니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 2022. 3. 17.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스페인이 1519~1521년 아즈텍 문명을 정하고 1535년 잉카문명을 정복하면서 신대륙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스페인이 이권 보호를 위해 유럽에 쏟아부은 자원에 비하면 극히 일부밖에 동원하지 않았음에도 두 문명을 멸망시켰습니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초기 군사 작전의 성공뿐만이 아닙니다. 강철 투구와 검에서 비롯된 전투력의 우위로 스페인의 승리가 보장되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틀락스칼텍스족 같은 원주민들이 스페인에 기꺼이 협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스텍 통치가 피지배층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기원전 1세기 철기시대의 민족들이 충돌할 때와 마찬가지로 잉카인이나 아스텍인들은 총기류는커녕 말조차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철이나 강철이.. 2021. 12. 19.
조선시대 전기의 수취 제도와 사회정책 수취 제도의 확립 조선의 수취 제도는 농사짓는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 집집마다 부과하여 토산물을 거두는 공납, 호적에 등록된 16세 이상의 정남에게 부과하는 군역과 요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양안을 근거로 징수한 전세는 수확량의 10분의 1세가 기본이며 매년 풍흉과 수확량을 조사하여 징수하였습니다. 세종 때 조세 제도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공법을 시행하여 그해의 토지 비옥도와 풍흉에 따라 전분 6 등법과 연분 9 등법을 시행하여 전세 액수를 1 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로 징수하였습니다. 전세는 쌀, 콩 등 현물로 징수하여 조운 제도를 이용하여 경창으로 수송하였습니다. 공납은 각 지역의 토산물을 조사하여 지역 관청에 물품과 액수를 할당하면, 지역 관청이 그 지역의 가호에 할당량을 분배하여 징수하.. 2021. 12. 15.
우리나라 국보 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위치 :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로 83(부여읍, 정림사지) 정림사지박물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개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은 백제시대의 대표적 석탑으로서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졌고 높이는 8.33m입니다. 정림사는 사비의 시내 한가운데 있던 중요한 절이었습니다. 1963년 12월 20일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개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한국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습니다. 탑 각부의 특이한 양식은 한국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미륵사지 석탑에서 시작된 백제 석탑의 형식을 정비한 이 탑 이후 백제 석탑의 형식은 다소.. 2021. 12. 13.
아메리카의 탄생 - 유럽의 콘도미니엄이 된 신대륙 콜론이 인도를 발견했다고 흥분하며 에스파냐로 돌아오자 일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인도에 닿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콜론의 항해는 예상한 것보다 너무 짧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동방 세계에 대한 그 시대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아시아 세계와 콜론이 기술한 '인도'에 관한 내용이 매우 달랐기에 그런 의심은 더욱 커졌습니다. 이런 풍조를 잘 이용한 인물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입니다. 베스푸치는 콜론이 인디아스라고 부른 땅이 실은 인도가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대륙 인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아메리카로 굳어지는 대륙 이름 1507년 도서 박람회에서 세계 지도를 첨부한 '지리학 입문'을 펴내면서 지도 제작자 발트제.. 2021. 11. 7.
조선시대 전기의 경제와 사회에 대해 알아보자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펴다. 조선은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중농 억상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 방편으로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주고 토지 개간을 장려하였으며 새로운 개간지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려 말 50여 만결 정도였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엽에는 160여 만결 정도로 증가하였습니다. 반면에 상공업에 대한 규제는 강화하여 사·농·공·상 간의 직업적 차별을 통해 상공업의 발달을 억제하였습니다. 또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 경제관과 함께 도로 등 교통수단의 미발달,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적 경제로 인한 화폐 유통의 부진 등도 상공업의 발달을 방해하였.. 2021. 11. 7.
우리나라 국보 8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특징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입니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 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습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습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 2021.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