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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138

조선 전기의 문화 성리학과 불교, 도교, 민간신앙의 발달 성리학의 발달 고려 말 급진파 사대부인 정도전, 권근 등은 관학파로 불리며 성리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불교, 도교, 풍수지리,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고려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부국강병을 추구하였습니다. 반면에 사림파라 불린 정몽주와 길재의 후학인 온건파 사대부들은 성종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당시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하려 하였는데 성리학 이외의 사상은 배격하였습니다. 16세기에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실천하면서 근본이 되는 인간 심성에 관심을 가지고 이기론을 발전시켰습니다. * 이기론 :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기의 움직임에 의해 우주 만물이 만들어지며, 이는 기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이자 운동.. 2022. 6. 14.
[우리나라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대해 알아보자. 국보 등록일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번지 건축 시대 : 백제시대 후기 7세기 미륵사지 석탑은 절반 이상 붕괴되어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있었는데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측면을 중심으로 1층 높이까지 석축이 보강되어 있었고 그 윗부분은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 콘크리트로 덧씌워 보수된 상태였습니다. 1층 내부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십자형 공간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심주석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고대 목탑의 구조와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 당시 백제 건축기술의 수준을 엿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 최고(最高), 최대(最大)의 석탑으로 그 가치가 큽니다. 한편, 2009년 1월 석탑 1층 심주석에서 사리장엄이 출토되었는데 금제사리봉영.. 2022. 6. 10.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2편 정복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사회를 냉혹하고 원시적인 비문명 사회로 낙인찍어 멕시코에서처럼 전면전과 잔혹한 살상을 서슴지 않은 건 물론, 원주민 고유의 특징들을 지워버리고자 기를 썼습니다. 현지 종교 시설을 파괴하고 기존의 관행은 근절시켰습니다.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선택할 수 있었지만 정식 승인된 종교는 기독교뿐이었습니다. 오스만과 무굴, 만주족이 정복했을 때에도 다른 종교 관행들이 이어지기는 했지만 유라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종교는 갈등의 원인이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인과 그들 후손의 수는 원주민 부족 인구를 결코 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 이교도들과 끝없이 전쟁을 벌이고 원주민에 대한 지배력을 이용하여 토착 귀족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한편, 협조적.. 2022. 3. 23.
조선 전기의 문화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을까? 15세기를 주도하던 관학파는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해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여 훈민정음의 창제(1443년)를 통해 민족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관학파는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이라도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여 자주적인 민족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교육 기관으로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을 서울에 두었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 중앙에 4 학과 지방에 향교를 설치하였습니다. 그 외 서원과 초등 교육을 담당한 서당이 있었습니다.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소과 합격생인 생원과 진사로 제한되었습니다. 지방의 향교는 부·목·군·현에 하나씩 설립하여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담당하게 하였고 중앙에서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여 교육을 담당하게.. 2022. 3. 21.
[우리나라 국보 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고귀한 석탑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 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낮은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합니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 2022. 3. 17.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스페인이 1519~1521년 아즈텍 문명을 정하고 1535년 잉카문명을 정복하면서 신대륙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스페인이 이권 보호를 위해 유럽에 쏟아부은 자원에 비하면 극히 일부밖에 동원하지 않았음에도 두 문명을 멸망시켰습니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초기 군사 작전의 성공뿐만이 아닙니다. 강철 투구와 검에서 비롯된 전투력의 우위로 스페인의 승리가 보장되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틀락스칼텍스족 같은 원주민들이 스페인에 기꺼이 협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스텍 통치가 피지배층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기원전 1세기 철기시대의 민족들이 충돌할 때와 마찬가지로 잉카인이나 아스텍인들은 총기류는커녕 말조차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철이나 강철이.. 2021. 12. 19.
조선시대 전기의 수취 제도와 사회정책 수취 제도의 확립 조선의 수취 제도는 농사짓는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 집집마다 부과하여 토산물을 거두는 공납, 호적에 등록된 16세 이상의 정남에게 부과하는 군역과 요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양안을 근거로 징수한 전세는 수확량의 10분의 1세가 기본이며 매년 풍흉과 수확량을 조사하여 징수하였습니다. 세종 때 조세 제도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공법을 시행하여 그해의 토지 비옥도와 풍흉에 따라 전분 6 등법과 연분 9 등법을 시행하여 전세 액수를 1 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로 징수하였습니다. 전세는 쌀, 콩 등 현물로 징수하여 조운 제도를 이용하여 경창으로 수송하였습니다. 공납은 각 지역의 토산물을 조사하여 지역 관청에 물품과 액수를 할당하면, 지역 관청이 그 지역의 가호에 할당량을 분배하여 징수하.. 2021. 12. 15.
우리나라 국보 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위치 :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로 83(부여읍, 정림사지) 정림사지박물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개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은 백제시대의 대표적 석탑으로서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졌고 높이는 8.33m입니다. 정림사는 사비의 시내 한가운데 있던 중요한 절이었습니다. 1963년 12월 20일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개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한국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습니다. 탑 각부의 특이한 양식은 한국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미륵사지 석탑에서 시작된 백제 석탑의 형식을 정비한 이 탑 이후 백제 석탑의 형식은 다소.. 2021. 12. 13.
아메리카의 탄생 - 유럽의 콘도미니엄이 된 신대륙 콜론이 인도를 발견했다고 흥분하며 에스파냐로 돌아오자 일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인도에 닿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콜론의 항해는 예상한 것보다 너무 짧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동방 세계에 대한 그 시대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아시아 세계와 콜론이 기술한 '인도'에 관한 내용이 매우 달랐기에 그런 의심은 더욱 커졌습니다. 이런 풍조를 잘 이용한 인물이 아메리고 베스푸치입니다. 베스푸치는 콜론이 인디아스라고 부른 땅이 실은 인도가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대륙 인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아메리카로 굳어지는 대륙 이름 1507년 도서 박람회에서 세계 지도를 첨부한 '지리학 입문'을 펴내면서 지도 제작자 발트제.. 2021. 11. 7.
조선시대 전기의 경제와 사회에 대해 알아보자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펴다. 조선은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중농 억상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 방편으로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주고 토지 개간을 장려하였으며 새로운 개간지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려 말 50여 만결 정도였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엽에는 160여 만결 정도로 증가하였습니다. 반면에 상공업에 대한 규제는 강화하여 사·농·공·상 간의 직업적 차별을 통해 상공업의 발달을 억제하였습니다. 또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 경제관과 함께 도로 등 교통수단의 미발달,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적 경제로 인한 화폐 유통의 부진 등도 상공업의 발달을 방해하였.. 2021. 11. 7.
우리나라 국보 8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특징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입니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 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습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습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 2021. 11. 5.
에스파냐, 잘못된 항로 선택의 결과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통치자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통치자 페르난도 2세가 혼인하면서 에스파냐는 통일 국가에 성큼 가까워졌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 후아나는 펠리페 1세와 결혼했는데, 잘 생긴 남편이 부정한 짓을 저지를까봐 늘 노심초사하다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나중에 '광녀 후아나'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에스파냐 왕에 오른 인물이 카를로스 1세입니다. 1519년에 오스트리아의 왕 카를 5세가 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하는 등 명함이 무척 많았던 왕으로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의 영광과 위기를 두루 겪었습니다. 콜론이라는 모험가의 도박이 성공을 거두다. 터키의 이스탄불은 에게해와 흑해 사이의 길목에 있는 도시로 비잔티.. 2021. 10. 6.
조선시대 사림의 성장과 성리학적 질서의 확산 사림(士林)의 등장 고려 말 등장한 신진 사대부는 조선 시대에 와서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계유정난(1453년)을 계기로 등장한 세조의 공신(정난공신, 좌익공신)들을 훈구 세력이라고 합니다. 훈구 세력의 기원은 고려 말 조선 건국을 주도한 급진적인 사대부 계열의 공신들로 조선 건국과 조선 초기 문물 정비에 적극 참여한 세력입니다. 이들은 고위 관직과 많은 토지를 세력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실권을 세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종은 세력이 커진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세력을 대거 등용하였습니다. 사림은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정몽주의 후학으로 성리학의 이념에 투철한 중소 지주 출신으로, 지방에서 학문과 교육에 힘쓰면서 향촌 사회의 지배층으로 자리 잡은 세력.. 2021. 10. 3.
우리나라 국보 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대홍리 319-8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입니다. 절 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安宗)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顯宗)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비석만이 남아 있습니다. 갈비(碣碑)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거북 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 2021. 10. 2.
강력한 해양 제국, 포르투갈 지중해의 변방인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 해양 강국이 된 데는 항해왕자라고 일컬어지는 엔히크의 노력이 있습니다. 나중에 마젤란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두루 거쳐 세계를 한 바퀴 돈 것도 엔히크가 닦아 놓은 기반 때문입니다. 포르투갈 국왕 후안 1세는 1300년대 국경 분쟁에서 에스파냐를 물리치고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엔히크는 그의 아들입니다. 엔히크 왕자의 머릿속은 온통 항해에 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각지에 항해 학교, 천문대, 도서관, 항구, 조선소를 세우며 해양 강국을 향한 꿈을 불태웠습니다. 인프라가 잘 갖추어지자 유럽 각지의 고급 항해사들과 기술자들이 포르투갈로 몰려왔습니다. 선박은 장거리 항해에 적합하게 개량되고 발전되었습니다. 헤게모니를 쥘 수 있었던 포르투갈의 역사 포.. 2021.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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