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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철학

고르기아스의 극단적 회의주의에 대하여

by EDMBLACKBOX 2022.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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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기아스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 수사학자입니다. 논쟁에서 이기는 법, 대중을 설득하는 기술 등을 가르쳤습니다. 소송에 휘말렸을 때 스스로 알아서 지켜야 했던 고대 그리스에서는 수사학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고르기아스에게 진리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두고 "진리엔 관심이 없고 오직 대중을 현혹하는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진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회의주의자였습니다.

 

 

회의주의(懷疑主義)

회의주의는 크게 종교적 회의주의, 과학적 회의주의, 철학적 회의주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회의주의는 어떤 신이나 종교도 믿지 않는 입장이고, 과학적 회의주의는 초능력·심령술·미신·수맥·점·굿 등과 같은 의사 과학(사이비 과학)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철학적 회의주의는 다소 성격이 다른데, 진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합니다.

 

 

좌측부터 피론,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회의주의자였던 세 사람

고대 그리스의 대표 회의주의자로 피론,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를 꼽습니다. 피론은 어떤 것이 확실한 진리인지는 알 수 없으니 진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하지 말자고 주장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자는 입장을 '피론주의'라고 합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하면서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은 없으며, 모든 진리와 도덕은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르기아스는 세상에 진리 따위는 없으며, 설령 진리가 있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찌 보면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의 입장은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모든 것이 다 진리일 수 있다고 했고, 고르기아스는 진리 자체가 없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둘의 결론은 무척 닮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진리라는 주장은 결국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비존재에 관하여

고르기아스는 '비존재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 3가지를 제시했습니다. 각각 존재론, 인식론, 언어에 관한 주장이 되는데, 이 3가지 명제는 철학의 모든 분과를 아우르는 주장이라 볼 수 있습니다.

 

1.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존재

2. 설령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 인식

3. 설령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전달할 수 없다 - 언어

 

고르기아스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더라도 우리가 알 수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언어와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로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없다고 합니다.

 

 

빨간 장미, 노란 장미

누군가 "이 장미는 빨갛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말 그대로 빨간 장미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노란 장미나 파란 장미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각각 서로 다른 시각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색깔을 평생 빨간색으로 알아왔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로 선천적으로 눈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 빨간색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빨간색이라는 관념은 개인의 경험일 뿐 언어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철학에서는 이를 '감각질 문제'라고 합니다. 이 감각질 문제로 인해 생각과 언어가 일치하지 않기에, 설혹 진리가 있고 안다고 해 결국 고르기아스는 진리에 대해 3중으로 된 검은 장막을 쳐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회의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회의주의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회의주의가 그 자체로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회의주의가 그 자체로 모순인 이유는 왜일까?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회의주의는 진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진리는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는 전달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진리는 전달되지 않는다'는 진리 그 자체를 여전히 전달하고 있으니 그 자체로 모순인 셈입니다.

 

하지만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그의 논증에는 허점이 많지만, 결론 자체를 반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고르기아스의 도전을 확실하게 막아낸 사람이 바로 칸트입니다.

 

칸트는 일단 '인간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고르기아스의 결론을 수용하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은 워래의 세계는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나타난 현상 세계는 알 수 있으니 그것을 진리로 보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기원전 5세기 시칠리아 수사학자의 도전을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받아낸 것을 보면 철학은 흥미로운 학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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