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우리나라 문화유산

[우리나라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대해 알아보자.

by EDMBLACKBOX 2022. 6. 10.
반응형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보 등록일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번지

 

건축 시대 : 백제시대 후기 7세기

 

 

미륵사지 석탑은 절반 이상 붕괴되어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있었는데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측면을 중심으로 1층 높이까지 석축이 보강되어 있었고 그 윗부분은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 콘크리트로 덧씌워 보수된 상태였습니다. 1층 내부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십자형 공간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심주석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고대 목탑의 구조와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 당시 백제 건축기술의 수준을 엿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 최고(最高), 최대(最大)의 석탑으로 그 가치가 큽니다. 한편, 2009년 1월 석탑 1층 심주석에서 사리장엄이 출토되었는데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에서 己亥年(639년) 명문이 확인됨으로써 석탑의 건립 시기 및 미륵사 창건의 주체와 성격이 밝혀졌습니다.

 

 

18년만에 다시 일반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던 미륵사지 석탑(2019년)

미륵사지 석탑 상세 설명 :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익산 미륵사는 무왕(武王, 600-641) 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륵사는 전형적인 1 탑 1 금당의 백제식 가람배치와 달리 세 개의 탑과 금당 등으로 구성된 3 탑 3 금당의 독특한 배치 형식입니다. 이 미륵사지 석탑은 세 개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입니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 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입니다.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습니다. 창건 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며, 17~18세기 이전 1층 둘레에 석축이 보강되고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상태로 전해졌습니다. 남아있던 6층까지의 높이는 약 14.2m이고 상·하 이층으로 구성된 기단의 전체 폭은 약 12.5m입니다.

 

1층은 각 면이 3칸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칸에는 문을 내달아 계단을 통해 사방으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기둥석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 기법과 양 끝 모서리를 약간 높인 귀솟음기법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기둥석 하부에는 목조건물에서처럼 별도의 초석이 있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상·하 인방석(引枋石)과 기둥 상부에 평방석(平枋石), 포벽석(包壁石) 등이 구성되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 측면 모습

옥개부(屋蓋部)는 목조건물의 지붕처럼 모서리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는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편 석탑의 1층 내부에는 십자형 공간이 조성되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출입이 가능하며, 탑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기둥(심주)이 4층까지 연속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며, 2009년 1층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의 기록을 통해 639년이라는 석탑의 건립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졌습니다.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이듬해 해체수리가 결정되었고 2001년 해체조사에 착수하여 2017년 조립공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고대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잘 보여줍니다. 또한 고대건축의 실제 사례로써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우리나라 불탑 건축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20년 만에 복원된 백제의 전유물

20년 만에 보수 끝내고 역사적으로 준공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2019년 4월 30일)

백제 무왕(재위 600∼641) 때 창건한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20년에 걸친 보수 공사에 마침표를 찍고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전라북도, 익산시와 함께 30일 오후 2시 미륵사지에서 석탑 보수정비 준공식을 열어 기나긴 해체·수리 작업이 마무리됐음을 공식적으로 알립니다. 준공식은 익산시립무용단 무용극을 시작으로 사업 경과보고, 가림막 제막, 기념 법회 순으로 진행됩니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최대(最大)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은 부재 1천627개를 짜 맞춰 새롭게 완성했습니다. 높이는 14.5m, 폭은 12.5m, 무게는 약 1천830톤입니다. 미술사적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석탑은 서쪽 금당(金堂)터 앞에 세운 서탑입니다. 백제가 왕실 안녕과 중생 불도(佛道)를 기원하며 조성한 미륵사는 금당과 탑이 각각 세 개인 삼원식(三院式) 사찰로, 중앙에는 목탑을 두고 서쪽과 동쪽에 석탑을 건립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 문신 소세양의 문집인 양곡집(陽谷集), 조선 후기에 편찬한 기행문 와유록(臥遊錄)에도 등장합니다.

 

영조 32년(1756)에 간행한 익산 읍지인 금마지(金馬志)는 미륵사지 석탑에 대해 "높이가 10여 장(丈)이며, 동방에서 가장 높은 석탑으로 속설에 전한다"며 "벼락 친 곳 서쪽 반은 퇴락했다. 흔들렸음에도 큰 탑은 그 후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일제는 1915년 석재들이 일부 무너져 내린 미륵사지 석탑을 콘크리트로 긴급 수리했습니다. 이후 석탑은 약 80년을 콘크리트에 엉겨 붙은 채 버텼습니다.

 

 

왼쪽 탑이 보수를 완료한 서탑입니다.

서쪽에서 보면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느껴진 미륵사지 석탑은 1999년 문화재위원회가 구조가 불안정하다는 안전진단 결과를 반영해 해체·수리를 결정하면서 대역사에 돌입했습니다. 이듬해 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가설 덧집을 설치했고,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1년 10월 6층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해체를 시작했습니다. 해체가 완료될 무렵인 2009년에는 미륵사를 창건한 인물이 '좌평 사택적덕(沙宅績德)의 딸이자 백제 왕후'이고, 사찰 건립 시기가 639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리봉영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삼국유사는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는 백제 무왕과 그의 왕비이자 신라 진평왕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라고 했으나, 사리봉영기에는 왕후가 사택적덕 딸로 기록되어 '서동요' 설화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을 둘러싼 또 다른 논쟁은 층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사진에는 석탑이 6층이었으나, 1990년대에 2년 3개월 만에 복원한 동탑처럼 9층까지 탑을 쌓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연구소는 6층 이하 부재만 현존하는 데다 7층 위로 돌을 올리면 옛 부재가 하중을 견디지 못한다고 판단해 한 세기 전처럼 6층으로 보수하기로 했습니다.

 

연구소는 이후 설계 과정에서 추론에 의한 복원을 지양하고, 훼손된 부재는 과학적 방법으로 보강해 되도록 재사용하며, 현대적 기술 적용을 최소화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에 따라 옛 부재 중 81%를 다시 썼고, 새 부재는 익산에서 나는 화강암인 황등석을 가져와 사용했습니다. 옛 부재와 새 부재 비율은 각각 65%, 35%다. 석재를 하나하나 떼어내고 185톤에 달하는 콘크리트를 제거한 뒤 다시 조립하는 데에는 16년이 걸렸습니다.

 

연구소는 2017년 조립을 완료하고, 가설 덧집과 울타리를 올해 초에 철거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이 단일 문화재로는 가장 오랫동안 수리한 사례로 기록되면서 다양한 연구 성과가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연구소에 따르면 미륵사지 석탑과 관련하여 집계된 학술 발표가 18건이고, 연구논문 14건, 학위논문 5건, 책자 9권이 나왔습니다. 특허 등록도 5건에 달합니다. 연구소 관계자는 "미륵사지 석탑의 진정성과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연말까지 연구 성과와 해체·보수 과정을 정리한 보고서를 발간할 계획"이라고 전했습니다.

 

 

[내가 사랑한 문화유산] 최태성 교사 편(익산 미륵사지 석탑)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