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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우리나라 문화유산

대한민국 국보 2호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by EDMBLACKBOX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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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지 십층석탑, 출처 : 위키백과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란?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 공원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탑으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2호입니다. 석탑은 1467년(세조 13년)에 세워졌으며 3층의 기단과 10층의 탑신으로 되어 있고, 인물과 화초 무늬 따위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맨 위 3층은 오랫동안 무너져 내려져 있던 것을 1947년에 원상태로 복구하였습니다. 부식 이유는 새똥이라는데 웃지 못할 사항인 것 같습니다. 2000년에는 표면 훼손이 심각하여 유리 보호각을 씌워 놓은 상태입니다.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습니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입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 자 모양입니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 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습니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 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 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위치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종로 99에 위치해있습니다.

 

 

세조, 원각사 창건

원각사는 조선 건국 이후 도성에 개창된 사찰로서, 원래 이름은 흥복사였습니다. 개국 초에는 조계종의 본사가 되었다가 후에 폐지되고 관청이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흥복사의 전각 중 서쪽 선당을 관습도감으로, 동쪽 선당을 예장 도감으로 사용하였고, 대전의 북쪽은 중학의 유생들이 모이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이후 1464년 4월 효령대군이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원각 법회를 열었는데, 법회 도중 여래가 공중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수백 개의 사리가 분신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세조는 이처럼 상서로운 일이 발생하자 그해 5월 다시 흥복사를 중건하여 원각사로 개명하도록 하였습니다. 원각사의 공사는 1464년 6월에 조성도감이 마련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찰의 조성에는 효령대군, 임영대군, 영응대군, 영순군과 영의정 신숙주, 좌의정 구치관 등이 도제조를 맡아 진행하였습니다.

 

이때 조성 공사에 참여한 군사는 2,100여 명 정도였고, 인근의 인가 200여 채가 모두 철거되었습니다. 철거된 집터에 대한 정부의 보상도 이루어졌습니다. 집터가 시전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기존 땅값의 3배를 쳐서 보상하였습니다. 아울러 원각사의 대종을 주조하기 위해, 동 5만 근을 개성부, 경기,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사들였습니다. 원각사는 공사가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1465년 4월 완성되었습니다. 이때 세조가 참석하여 낙성식을 열었는데, 승려 128명이 참석하여 어정구결로 번역한 '원각경'을 읽었습니다. 또한 세조는 승려 2만 명에게 공양을 베풀었습니다.

 

조선왕조는 건국 이후 '숭유억불'을 내세웠지만, 왕실에서는 불사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세조는 원각사를 창건하고 절의 동남쪽에 따로 어실을 조성하였고, 예종은 원각사에서 세조의 백일재를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원각사는 왕실의 기복뿐 아니라 기청제와 기우제도 지내는 등 민생 안정을 기원하는 사찰로도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유생들을 중심으로 불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1474년 원각사의 어실이 폐지되고, 사찰의 수직 군사들도 철수하는 등 왕실 사찰로서의 지위가 약화되었습니다. 급기야 1488년 원각사에 불이 나 성종이 중수를 명하였으나, 억불을 주장하는 대신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연산군 대에는 원각사의 탑이 훼손되었고, 법당의 불상을 회암사로 옮기는 한편, 사찰의 승려들을 내보내 폐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1504년 연산군이 원각사에 흥청·운평 등 기생을 두면서 연방원을 만듦으로써 승려들이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원각사를 철거하여, 그 재목을 연산군 때 집을 헐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한, 원각사 터를 한성부 청사로 활용했으나 판윤 전림이 이곳에서 병을 얻어 죽은 이후로 사람들이 불길한 곳이라고 생각하여 이전 청사로 되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왕실의 주도하에 건설된 원각사는 점차 사찰로서의 역할을 잃었으며, 1554년과 1565년 두 차례 화재로 절터의 흔적마저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유리 보호각으로 보호되고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

유리 보호각으로 보존하고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

원각사가 폐사된 후 절에 남아 있던 대종은 1536년 남대문으로 옮겨졌으며, 원각사 터에는 십층석탑과 비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1897년 총세무사(개항장의 세관을 관리하던 관직)로 초빙되었던 영국인 브라운(Brown, J. McLeavy)이 원각사 터를 공원으로 개발해서 보존할 것을 건의하여 탑골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탑골공원은 공원 내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파고다(pagoda) 공원이라고도 불렀습니다. 1934년 경성부에서 간행한 '경성부사'에 따르면 원각사지 십층석탑처럼 대리석으로 만든 탑이나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의 경우 하얀색을 띠기 때문에 속칭 백탑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백탑이라는 음이 전화하여 '파고다'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또한 '파고다'라는 말은 '신에 귀의한다'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파가바티(bhagavati)'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말은 영어로 파고다(pagoda)라고 하며, 탑골공원에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어 '파고다 공원'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 파고다 공원으로 불렸다가 1992년 이 지역의 명칭이 '탑마을', '탑골', '탑사동'이었기 때문에 옛 지명에 따라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이러한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현재 국보 제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석탑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뛰어날 뿐 아니라 일반 석탑과는 달리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대리석이 다른 석재보다 무르기 때문에 산성비나 미세먼지, 황사 등 대기오염 물질이나 조류의 배설물 등에 의해 석탑이 쉽게 부식되거나 변색되는 단점도 발생하였습니다. 따라서 1990년대에 들어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훼손이 심해지자 이에 대한 보호 대책과 보호 시설의 건립이 논의되었습니다. 이에 1997년부터 새의 배설물과 산성비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장기적인 보존 대책으로 석탑에 유리로 제작된 보호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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