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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우리나라 문화유산

우리나라 국보 1호, '숭례문'의 진실

by EDMBLACKBOX 2021.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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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호 숭례문

숭례문이란 무엇인가?

숭례문(崇禮門) 또는 서울 숭례문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4 대문 중 하나로 남쪽의 대문입니다. 흔히 남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이 붙인 명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아래 '숭례문과 남대문, 명칭 문제'에서 자세히 언급) 서울 4 대문 및 보신각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동), 의(서), 례(남), 지(북), 신(중앙)의 5 덕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숭례문의 편액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설이 많습니다. 1396년(태조 5년)에 최유경이 축성하였습니다.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지어 졌습니다.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습니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범 채종기의 방화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습니다. 서울 중구청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했고,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 기상요인에 의한 추가 붕괴 방지를 위하여 덮개를 씌웠습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어, 2013년 5월 4일 복원 완료를 기념하는 완공식이 거행되기도 하였습니다.

 

 

숭례문의 역사적 기록

1396년(태조 5년) : 최유경이 준공하였습니다.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액을 썼습니다.

1398년(태조 7년) : 숭례문을 완성하였습니다.

1433년 7월 : 숭례문을 완전히 헐고 땅을 돋운 뒤 새로 짓기로 정했습니다.

1447년 8월경 : 숭례문 신축 착공.

1448년 3월 17일 : 숭례문 신축 완공.

1478년(성종 9년) : 숭례문이 기울어졌습니다. 그 시기의 적절성으로 수리를 미루었습니다.

1479년 4월 2일 : 숭례문 중수 완공.

1907년 :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본 제국은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습니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 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1908년 9월 : 숭례문과 소의문 부근 성벽 총 77 간이 훼철되었습니다.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하였습니다. 1호 원각사지 십층 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했습니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습니다.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 십층 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습니다.

1961년 : 한국전쟁 때의 파손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 해체 중수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1962년 12월 20일 :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하여 남대문을 국보 제1호로 재지정했습니다.

1963년 : 해체 중수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 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습니다.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하였습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 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전하였습니다.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습니다.

2005년 5월 27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도로 속에 고립되었던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하였습니다.

2006년 3월 3일 : 중앙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2008년 2월 10일 :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2008년 2월 11일 : 석축과 1층 일부 만을 남겨놓고 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다 타 버렸습니다.

2010년 2월 10일 : 숭례문 복구공사 착공.

2013년 4월 29일 : 숭례문 복구공사 완공.

2013년 5월 1일 : 숭례문 관리단체를 종전 중구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변경하였습니다.

2013년 5월 4일 : 다시 숭례문을 공식 개방하였습니다.

 

숭례문 방화범 채종기 씨

숭례문 방화 사건

'숭례문 방화 사건'은 2008년 2월 10일부터 2월 11일에 걸쳐 서울의 숭례문이 방화로 인해 전소된 사건입니다. 방화범은 채종기(당시 69세, 경북 칠곡 출신)로 밝혀져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20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1시 54분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모두 붕괴되었다. 그 이후 관리소장들은 각 문화재 단청에 CCTV를 설치하였습니다.

범행 이유 : 경찰은 강화도 하점면 장정 2리에서 긴급 체포한 용의자 채종기 씨를 상대로 밤샘조사를 벌여 범행에 대한 자백을 받아내었습니다. 채종기 씨는 1997~1998년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자신의 토지가 재개발되는 과정에서 시공사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관계기간에 수 차례 민원을 제기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회적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창경궁에 이어 숭례문까지 연속 방화에 나선 것으로 경찰은 분석했습니다. 채종기 씨의 집에서 발견된 '오죽하면 이런 일을 하겠는가'라는 제목의 4장짜리 편지에도 토지보상금 문제, 민원 제기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함, 사회에서 받은 냉대 등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고 경찰은 전하였습니다.(한겨레)

 

 

숭례문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세종대로 40

백범광장에서 숭례문을 지나 돈의문 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입니다.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은 한강과 도성을 최단거리로 잇는 문이어서 사람과 물자의 통행도 가장 많았습니다. 상업이 발달한 조선 후기에는 문 밖에 칠패시장, 문 안 선혜청 창고 앞에 남대문 조시(朝市)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중 칠패시장은 종루, 이현(梨峴)의 시장과 함께 ‘도성삼대시(都城三大市)’로 꼽혔으며, 남대문 조시는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서구(西歐)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서울을 개방한 이후에는 남대문 인근의 정동에 각국 공사관(公使館)과 외교관 사택,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들이 들어섰습니다.

 

1899년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숭례문은 더 이상 문의 구실을 못하게 되었고, 1907년에는 교통 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숭례문 양쪽 성벽이 철거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남대문로 주변에 대형 건축물이 들어설 때마다 성벽이 철거되어 숭례문 주변에서는 옛 성벽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현재 숭례문 구간에서 한양도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세 군데 있습니다. 밀레니엄 서울힐튼과 SK남산빌딩 뒤쪽의 성벽,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올리브 타워로 이어지는 길가에 성벽 일부가 담장처럼 남아있으며,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아랫부분에서 50m 정도의 성벽을 볼 수 있습니다.

 

 

숭례문이 국보 1호인 이유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것은 일제였습니다. 한반도 주요 산자락마다 쇠말뚝을 박고 주요한 문화유산을 파괴해 민족정기를 흐렸던 일제가 숭례문을 파괴하지 않고 국보 1호로 지정한 것은 임진왜란 때 왜병이 숭례문을 통하여 도성에 입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국보의 호 순위는 큰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문화유산보다 가치가 월등해서도 물론 아닙니다. 단순히 전국에 산재한 문화유산을 관리하기 편하도록 임의로 만든 목록번호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 국보의 순위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순위로 매기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 듭니다.
국보 1호 숭례문 -> '국보 숭례문'으로 60년 만에 '지정번호' 폐지
문화재청은 2021년 2월 8일 올해 주요 업무 추진 내용을 발표하며 "문화재 지정번호가 문화재를 서열화한다는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1962년 '문화재 보호법' 시행으로 시작된 지정번호를 없애고 내부 관리용으로만 운영하겠다"라고 밝혔습니다. 즉 기존 지정번호는 유지되지만, 관리용으로 사용되고 공문서나 누리집 등에서 지정번호 사용이 제한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숭례문과 남대문, 명칭 문제

남대문이라는 명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명될 때 붙어진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소문이 언젠가부터 퍼졌습니다. 특히 숭례문 전소 이후 의식적으로 남대문을 피하고 숭례문으로 부르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이런 오해(혹은 악의적 왜곡)가 널리 퍼지기도 했습니다. 이는 잘못된 오해 중 하나로, 사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도 백성들은 이미 편하게 남대문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많으며, 단어 수도 남대문이 숭례문보다 더 많습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정식 명칭과 통상 명칭이 다른 예는 매우 흔하며, 남대문 역시 숭례문의 통상 명칭으로 불린 것일 뿐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 9월 24일 기사에는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이라 하여 보통 동대문, 남대문으로 부른다고 했는데 여기서 속(俗)은 속되다, 천박하다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간에서는, 백성들은'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우리가 흔히 접하는 "속칭 ~이다"와 같은 맥락입니다.). 백성들은 물론 신하나 군주들까지도 즐겨 남대문, 동대문 등으로 불렀습니다. 세종 9년 1월 26일 기사에는 '上曰: 明日置于南大門外愼以衷之家'라고 했는데, 여기서 상은 세종대왕입니다. 그 외에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도 남대문이라고 부른 기사가 있으며, 실록을 쓰는 사관조차 성종 14년 12월 4일에 보면 '南大門內行廊失火, 延燒十餘間'이라 하여 남대문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매천야록을 저술한 매천 황현(1855~1910)은 경술국치 16일 후 절명시(여기서도 '남대문'을 언급)를 남기며 자결한 인물로, 야사임을 떠나서, 일제강점기 이전의 기록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도 또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대문, 동대문 명칭은 잘못된 것도, 일제의 잔재도 아닙니다. 백성은 물론 군신이 모두 친근하게 아무 이견 없이 남대문, 동대문이라 한 것을 전소 사건 이후 '남대문은 틀린 이름' 이라거나 '일제 잔재'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불성실일 뿐입니다. 수원에서도 장안문과 팔달문을 북문, 남문이라고 부르는 것도 비슷한 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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