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우리나라 문화유산

국보 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에 대해 알아보자

by EDMBLACKBOX 2021. 7. 10.
반응형

여주 고달사지 승탑

여주 고달사지 승탑이란?

여주 고달사지 승탑은 경기도 여주시 고달사 터에 있는, 고려시대 초기의 화강석제 부도입니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높이는 3.4m이며, 8각 원당형(圓堂形) 부도 중에서 매우 뛰어난 거작입니다. 조형 양식이 신라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적인 면에서는 고려시대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신라 말의 고승 원감 대사의 묘탑이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절터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의 묘탑인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보다는 앞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여주 고달사지 승탑 세부사항

높이는 3.4m이며 국보 제4호입니다. 기단부·탑신부·옥개석 등을 모두 갖춘 전형적인 팔각 원당형 승탑이나 상륜부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기단은 수매의 판석으로 짜인 8각 지대석 위에 각기 1석씩으로 조성된 굄대를 놓고 그 위에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얹어 형성하였습니다. 굄대는 지대석의 8각에 각을 맞추어 놓았는데, 윗면에는 2단의 굄단을 마련하여 하대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하대석 또한 8각의 모를 맞추었으며 측면에는 각 면 2구씩의 가늘고 긴 안상을 오목 새김 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지선(地線) 중앙으로부터 올라온 귀꽃 모양 1좌씩을 조식하여 장식적인 안상(眼象)을 꾸미고 있습니다. 측면 상단에는 갑석형을 돌리고 윗면에 16판의 복엽 복련문(覆蓮文)을 조각하였는데, 각 변과 여덟 모서리에 1판씩 배치하였고 상단부에는 얕은 1단의 굄으로 중대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중대석은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 용과 운문(雲文)을 조각하였는데, 귀두(龜頭)는 원각으로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으나 형식화된 경향이 보입니다. 용두(龍頭) 또한 웅장하고 수법이 대담합니다. 이들 귀부(龜趺)와 운룡의 조각은 거의 원형의 표면에 돌려져 있는데, 이 중대석의 상하단은 높직한 갑석형을 8각으로 돌려서 상하의 부재에 맞도록 하였습니다. 8각 상대석은 하면에 깊숙이 받침을 각출하였는데, 대개의 경우 받침단은 밖으로 나와 중대상단보다 더 넓어지고 있는 데 비하여, 여기에서는 반대로 훨씬 좁아지고 있습니다.

 

측면에는 여덟 판의 큼직한 복엽앙련을 조각하였습니다. 상단에는 갑석형을 돌리고 그 위에 3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탑신을 받고 있습니다. 탑신에는 각 면에 우주를 모각하고 문비형(門扉形)과 사천왕상·창살 등을 조각하였는데, 특히 문비와 자물통의 표현이 형식에 흐르고 있습니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꺼운 편으로 아랫면에는 깊숙이 낮고 널찍한 받침을 조각하여 탑신석 상단부와 맞게 하였습니다.

 

낙수면은 석탑 옥개형으로 기왓골 등의 표현이 없으며 낙수면의 합각선이 뚜렷하고, 여덟 귀퉁이 전각에는 큼직한 귀꽃 모양이 조식되어 있습니다. 이 귀꽃 모양은 다른 승탑 옥개석의 귀꽃 모양보다 높은 편이나 표면에 나타난 조각은 가냘파 보이기도 합니다. 옥개석 정상면에는 복련을 돌리고 상륜부를 받치도록 하였는데, 현재는 보개석만이 남아 있습니다.

 

보개는 옥개석을 줄여 놓은 것같이 그 조형이 같습니다. 그 위에 원공(圓孔)이 관통되어 있는데, 이것은 찰주(擦柱)에 꽂기 위한 것으로 화려하였을 상륜을 연상시킵니다. 이 승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정제된 조형과 세련된 조각수법에서 장중한 작풍을 보이고 있습니다. 건립연대는 중대석의 귀두부와 운룡문·연화문, 탑신부의 조각 양식과 수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 초기인 10세기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승탑은 신라시대에 정착된 팔각 원당형 승탑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정제된 조형미와 세련된 조각수법에서 장중한 작풍을 보이고 있습니다. 나아가 9세기 말 강원도 양양 선림원지에서 시도된 중대석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주목됩니다. 승탑에 딸린 탑비(塔碑)가 없어 주인공을 알 수 없지만, 각 부의 조각 수법과 양식 등으로 보아 같은 사역에 있는 원종대사(元宗大師, 968년 입적, 광종 9)의 묘탑(墓塔)인 혜진탑(慧眞塔) 보다 앞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승탑은 사역에서 떨어진 서쪽 산 중턱에 위치한 까닭에 1950년대까지는 지대석은 물론 석축이 모두 매몰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상황에서도 마을에서는 매년 8월이면 금줄을 매고 제의를 지냈다고 합니다. 1950년대에 도굴범들에 의해 옥개석이 일부가 파손되어 이를 바로 잡고, 토사의 유출로 인해 매몰되었던 지대석을 노출시키고, 석축을 정비하던 중 건립 당시의 배면(背面) 석축과 더불어 배례석 및 8 각형의 석재가 확인된 바 있습니다. 1979년에 이르러 옥개석에 대한 접착 공사를 진행한 후 보존되다가 2002년 봄에 다시 도굴범에 의해 옥개석이 들려지고, 귀꽃의 일부와 상륜부재가 파손되어 같은 해 8월에 정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주 고달사지 승탑 위치는 어디인가?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

 

 

*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는 여주 고달사지 승탑의 제작시기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 기존의 백과사전이나 책에는 3.4m로 나와있는데, 정밀실측조사보고서에서는 4.36m라고 밝혔습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