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세계사

제1차 세계대전 원인과 전개 과정

by EDMBLACKBOX 2023. 7. 10.
반응형

세인트 빈센트급 전함, 20세기 초 각국은 경쟁국보다 뒤처지는 게 두려워 해군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20세기 강대국 경쟁과 국제 질서의 변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제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강대국의 이권을 수용함으로써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기존의 정책은 독일을 필두로 각국의 권익을 보다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정책으로 바뀌었습니다. 강대국들이 동맹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쟁 동맹 체제가 발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산업사회와 도시 생활, 민주적 포퓰리즘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한 우려로 당시의 생소한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었습니다.

 

강대국들은 군대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했습니다. 육지와 해상을 막론하고 대포 등의 신무기를 개발하는 건 물론이고 군사 전략과 계획을 발전시킬 수 있는 조직적 수단과 체계를 도입했습니다. 1910년대만 해도 1911년 신해혁명, 1913년 쿠데타에 이어 발생한 멕시코 혁명, 그리고 니카라과와 아이티,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에 대한 미국의 개입 등 다양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라예보에서 울려 퍼진 총성이 세계 1차 대전으로 이어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과 전개

제1차 세계대전은 지역의 정치적 외교적 발전과 관련된 참가국들의 인식 때문에 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가 철도를 건설해 군사와 물자를 수송하는 등 군사력을 향상하자 독일은 결국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믿고 전쟁을 일으킬 최적의 순간만 노렸습니다. 게다가 최근 참여한 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해 자부심과 자신감도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습니다.

 

독일의 주요 동맹국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전략적·정치적 입지가 명백히 약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러시아를 등에 업은 세르비아가 발칸 반도의 오스트리아 영역을 침범하려 들자 우려가 커졌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자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감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르비아와의 전쟁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여겨졌습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가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을 때,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그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를 포함한 남슬라브족 영토에서 합스부르크 왕조를 몰아내기로 결의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비밀조직 흑수단 소속이었습니다. 비보를 듣고 충격에 빠진 비엔나는 곧장 행동에 돌입했는데, 암살이 세르비아를 공격할 명분을 제공해 준 것입니다.

 

 

국경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행군 중인 벨기에 경보병대

독일이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인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와 국지전을 벌였습니다. 이에 독일도 오스트리아를 전쟁에 끌어들이고 독일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이만한 기회가 없다고 판단해 곧장 행동에 돌입했습니다. 1914년 8월, 독일은 프랑스를 격파하고 프랑스 동맹국이던 러시아를 도발하기 위해 중립국 벨기에를 공격합니다. 그러자 벨기에의 중립국 지위를 보장하던 영국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영국 군인들이 포탄 야적장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압력과 망각: 군부와 권력의 오류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그리고 군사 지도부의 요청에 의해 참가국 정부들이 직접 행동에 나섰습니다. 독일은 적개심을 신속하게 확산시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전쟁 참가국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단기간에 대응 가능한 수준에서 마무리되는 정규군 간의 국제 전쟁으로 구상했습니다. 전쟁은 국정의 실패가 아니라 억제력 붕괴의 결과로 일어났습니다. 군부는 상당히 압박해 왔고 권력의 수뇌부는 평화와 질서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망각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전쟁 위협으로 적진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지만 계산착오였습니다. 모두가 실수를 범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원했지만 발칸 반도에만 국한되기를 원했고, 도덕적으로 무감각했던 독일은 더 이상 오스트리아를 말릴 수도, 프랑스-러시아 연합국 앞에 후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완고했고 러시아의 정책은 무용지물이었으며 벨기에의 중립국 지위를 보장한 영국은 지정학적 논리에 따라 참전 이외에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1914년, 영국은 이 같은 위기를 전통적인 수단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를테면 나폴레옹전쟁의 결과로 열린 빈회의 이후 평화를 유지해 온 4국 동맹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이는 오스만제국과 발칸동맹 사이에 벌어진 제1차 발칸전쟁이 확대되는 걸 막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14년 당시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본래 정치·문화적으로 호전성이 상당히 강한데 1910년대 초반에는 이 같은 경향이 더더욱 두드러졌습니다. 강력한 민족적 애국심은 뒤쳐져선 안 된다는 위기감과 함께 공격 기회가 항상 있는 건 아니라는 조바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독일은 정치보다 군사적 요소를 우위에 둠으로써 1914년과 1917년, 영국과 미국을 각각 전쟁에 끌어들입니다. 하지만 벨기에를 거쳐 더 쉽게 진격하고 잠수함 공격을 통해 영국 무역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군사적 명분으로 정당화된 정책들은 중대한 전략 실수로 판명되었고 결국 독일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참호 속에서 숨을 고르고 이쓴ㄴ 병사들

전략적 교착 상태와 작전 실패: 복잡한 전쟁의 모습

유혈이 낭자하는 교착 상태, 그리고 무의미한 도살전이 계속된 이 대혼란의 이미지는 공공 기념식이면 끊임없이 등장하는 모티브가 되었지만, 사실 상황은 훨씬 더 복잡했습니다. 전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전략적 교착 상태, 작전 실패, 전략 부족, 분쟁에 관한 우유부단한 인식이 모두 합쳐진 잘못된 결과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동유럽과 발칸 반도, 중동, 독일 식민지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전쟁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는 1915년 과 1916년 각각 전쟁에서 밀려났고, 1917년에는 러시아가 패했으며, 이탈리아는 패배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마침내 1918년, 불가리아와 터키, 오스트리아, 독일이 모두 대패해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서부전선은 보기와 달리 계속 시끄러웠습니다. 연합군은 전에 없이 강력한 화력을 활용해 독일의 참호 체계를 효율적으로 뚫고 진격할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1918년에는 넓은 전선을 따라 예비군을 집중 배치하고 독일군이 탈출로를 봉쇄하지 못하게 지속적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연합국은 특히 화력과 기동력의 결합 등의 지휘 문제뿐 아니라 전쟁 전 수십 년 동안 전략가들을 괴롭혀온 여러 문제를 극복했습니다. 항공 정찰 결과에 기술력을 더해 적군의 참호 체계를 밝혀내고 그에 따라 대포를 배치한 것입니다. 이는 독일군에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서부전선 이외 지역에서의 분쟁은 여느 전투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던 반면, 수도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는 1916년 아일랜드 반란, 1917년 볼셰비키의 러시아 접수, 전쟁 말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민족주의 운동 등에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독일의 작전은 마른 전투에서 연합군의 반격으로 서부 전선이 참호 라인을 따라 안정되기도 전인 1914년 이미 실패했습니다. 러시아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전선이 둘로 나뉘어 있던 전쟁이 영국의 참전으로 더 길고 힘겨워진 것입니다. 이는 1864~71년 프로이센-독일 동맹이 프랑스와 맞붙으면서도 전선이 두 개로 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많은 목숨을 빼앗아 갔던 솜 전투(Battle of Somme)

독일의 지나친 자신감과 협상국의 강력한 저항

1914년 말, 독일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전략은 위태로웠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이었습니다. 모든 단계에서 자신감이 하늘을 찔러 위험할 정도였습니다. 독일은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또다시 재현돼 당시 비슷한 지휘 실패를 겪었던 프랑스가 제풀에 무너지기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대본대로 되는 건 아무도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예상보다 강력했고 오히려 독일군의 사상자가 속출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병력과 무기가 뒤처졌음에도 지휘력이 훨씬 뛰어났던 세르비아를 정복하는 데 실패했고 러시아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은 기습 공격과 속도전, 압도적 규모, 역독성을 강조하는 독일의 전쟁 방식이 예비군을 동원해 철도로 군에 재배치하는 프랑스식 방어 전술을 효과적으로 뚫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방어 시설을 전략 기지로 활용했을 때의 잠재적 위험을 과소평가했습니다. 독일의 지휘관들은 참호 기지에 대해 한번 살펴보고 지나가면 끝인 걸로 생각했습니다. 프랑스군이 지나쳐온 방어 기지에서 공격해 나올 줄 상상도 못 했습니다. 실제로 독일은 1914년 파리에서 프랑스 제6군을 마주치자 진군을 멈추고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포위를 통한 승리와 전멸 전투를 강조한 서부전선의 전략은 1914년 10월 마침내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지휘관들은 전쟁 내내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고 적진의 최전선을 뚫어 이동전쟁을 재개하려 했지만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습니다. 대신 최전선이던 서부전선에서는 복잡한 참호체계가 확립되었습니다.

 

이렇게 끝도 없는 전투가 4년간 계속되다 1918년에서야 결정적 돌파구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때까지 독일군은 풍부한 군사 자원에 의존한 전투를 펼쳤을 뿐, 엄청난 인명 피해 때문인지 계속된 프랑스군의 결의와 끈기는 흉내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공격에서 영국군이 화력과 정확성 면에서 한층 더 발전된 대포를 전진배치함으로써 이전보다 더 효율적으로 전장을 지배했습니다.

 

전쟁이 예기치 않게 일찍 종결되자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한 전차 등의 신무기 개발이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사실 최전선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전차가 기동전 수행 자체보다는 1918년 한 곳에서만 이뤄지던 전투를 기동전으로 전환할 때 더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움직이는 화력을 이용해 참호 공격에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전차는 또 더 정확한 화력의 조준이 가능해 서부전선을 공격할 때 일반적으로 쓰였던 대량 폭격의 효율성을 높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내구성과 화력, 보호 능력, 속도, 다양성, 유동성, 지휘와 통제, 신뢰성이 모두 상대보다 뒤떨어져 1918년 독일군은 대전차 기술 및 무기의 개발에 더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 결과 전차는 하나의 결합된 무기이자, 그리고 보병지원용 무기로서 큰 성공을 거둡니다.

 

 

동부 전선

동유럽에서는 전투가 집중적으로 일어나지 않아 전장의 크기에 비해 무장 병력의 비율이 훨씬 낮았습니다. 따라서 1915년 독일군이 러시아를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전선을 뚫고 빠르게 진군하는 게 한결 수월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 독일이 1915년 세르비아, 1916년에는 루마니아를 정복하면서 특정 환경에서 완승을 거둘 수 있는 현대 육군의 역량이 입증되었습니다.

 

연합국 또한 동아프리카를 제외한 독일의 모든 식민지를 신속하게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투르크족은 훨씬 강력했습니다. 1915년 투르크족의 중심부를 겨냥한 갈리폴리 공격이 실패하면서 현재의 이라크 지역으로 진격하려던 영국군 또한 저지당합니다. 계속 저항하던 투르크족은 1918년 결국 패하고 맙니다.

 

제1차 세계 대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1차 세계 대전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솜 전투 폭격으로 파괴된 마을. 힌덴부르크 선을 넘는 마크 V 전차.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기뢰에 맞아 침몰한 HMS 일레시

ko.wikipedia.org

 

 

제1차 세계 대전 - 나무위키

위 영상에서는 잘 나오지 않던 중동・북아프리카・동아프리카 전선이 나오는 영상. 아래는 주요 전투에 전용 항목이 있는 만큼 요약해서 서술된 제1차 세계 대전의 전개이다. "20세기는 1914년에

namu.wiki

 

728x90
반응형

댓글